발전기 I

  • 특별활동 (동아리) 1977.04
  • 자율학습 운영 1977.05

    고교진학, 대학진학을 준비할 날도 점점 줄어만 가고 경기도 학력고사가 눈 앞에 다가오고 있을 무렵 전 인성식구의 자율학습 상태를 조사해 보았다.

    예비고사가 코앞에 다가 왔고 고난의 대명사인 본고사가 앞에 놓여 있는 고3 은 7시까지 등교하여 14시간동안을 수업 및 자율학습으로 학교에서 보내고 9시에 하교를 한다. 자율학습은 각자가 시험에 대비하여 미비과목을 보충하고 있다.

    12월에 있을 연합고사를 준비하는 중3은 7시50분까지 등교하여 각자 부족한 과목을 공부하기도 하고 주요과목의 문제를 풀어보기도 한다.

    학력고사가 있는 고등학생들은 1학년의 경우 모든 반들이 7시 50분까지 등교, 주요과목을 그 방면에 실력이 있는 사람의 지도로 배우고 있고 또 어떤 반은 오후에도 실시하고 있다.

    고2는 한 반만이 7시 50분까지 등교, 자율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중학생으로서의 자태가 제법 갖추어진 중1은 수업 후 6시까지 시험에 대비, 한사람의 지도 하에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중2도 오전 8시부터 8시 30분까지 자율적으로 학습에 전념하고 있다.

  • 교직원 현직 교육연구의 심화 1977.05

    매주 금요일이면 중・고 합동직원회의를 열어 교사 한 분씩 돌아가면서 교직원 현직교육을 실시했다. 그 주제들을 살펴보면

    박원호 교장님의 〈교사의 사명감〉,

    최상근 교사의 〈가정방문과 결석생지도〉,

    문무영 교사의 〈예습문제와 출제 문항 작성〉,

    김성찬 교사의 〈학교 생활과 신앙지도〉,

    조창호 교사의 〈생활지도의 방향과 교사의 활동〉,

    엄대용 교사의 〈IQ와 학습상관도〉,

    윤미희자 교사의 〈문제아 지도와 교우관계의 활용〉,

    석세란 교사의 〈색체 배열에 의한 학습 분위기 조성〉,

    심상구 교사의〈고등학교 평준화에 따른 효율적인 절대평가 방안〉등이다.

  • 인성이 걸어온 25년에 대한 회고 1977.05.

    인성의 초기에 근무한 교사들과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실린 「인성신 문」36호에 실린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 최상근 교사

    이제까지 많은 활동과 행사 속에서 생활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동안의 인상 깊었던 행사를 보면 먼저 여름방학 동안의 봉사 활동으로 간석동으로 나가 노인 학교를 개최한 일이다.

    1주일 동안 춤, 노래, 건강지도, 성경공부 등을 한 후 수료증을 드리니 노인들은 매우 기뻐하셨다.

    부활절 행사로 1976년 경찰서의 유치장, 시청 근무자, 소년교도소 등을 방문하여 학생들이 정성스럽게 꾸민 달걀을 전달하였고 성탄절에는 애기봉의 군인 방문, 대민 봉사하시는 분(도서관 할아버지, 역원, 우체부, 신문배달자 등) 의 초청, 오암원의 맹인들의 연주가 있었다.

    매주 있는 학생들의 태도가 습관화 된 듯하고 신앙심도 약화된 것 같다. 각 반의 주최 예배와 예배 시작 전의 찬송가 익히기는 매우 바람직하며 이제는 신앙의 깊이를 좀 더 깊게 하였으면 한다.

     

    * 조창호 교사

    초기 근무 시와 요즈음은 달라진 것이 많다. 학생들의 태도를 보면 많은 예절이 소멸되었고 사람됨, 인간성을 중히 여기던 가치관도 공부 실력을 전부로 생각하게 되었다.

    또 현모양처를 목표로 했던 교육도 이제는 대학 입시와 직업여성을 배출하기 위함으로 바뀌었다. 초기 학생수가 적어 가족적 분위기에서 많은 대화가 따랐으나 양적인 신앙생활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이익 추구의 회사 같은 2차적 사회로 변모하였고 대화도 단절되어 이해심이 적어 졌다.

    그러나 신앙은 질적으로 향상된 듯싶다.

     

    * 윤미희자 교사

    그리 좋지 않은 주위 환경에서도 학생 중 90%가 기독교인이었던 그 당시는 월요일마다 각 반 주최로 예배를 보았다.

    부흥회 때에는 이틀 동안 수업을 모두 페하고 세례, 성경공부, 철야기도 등이 있었고 추수감사절에는 축제 분 위기 속에서 반 대항 배구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운동장에서 불 피워 놓고 실시했던 시와 음악의 밤이다.

    내적 충실 을 위해서라 대외적으로 커다란 활동은 없었으나 고등학교의 첫 번째 봉사활동은 도일교회와 고잔교회를 방문하여 봉사활동 헌금과 학용품 모집으로 가두전도, 축호전도 등의 봉사활동이 있었다.

    이제 졸업생으로서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은 교훈대로 신앙의 바탕 위에 자유를 느끼며 봉사하는 자세를 확립하는 여학생, 내적(內的)으로 충실한 여학생이 되고 기독교 행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소멸되어 가는 인성의 분위기를 살리자는 것이다.

     

    * 오문순 교사

    지금은 60년대에 내가 공부하던 것과 여러 가지로 주위환경이 좋아졌다. 그러나 학습 분위기는 향상 된 듯 하지 않고 토요일마다 학생들을 긴장시키는 주말 검사가 생겼다.

    그 당시는 주말 검사는 없었지만 생활지도는 무척 엄했다. 요즈음 생각하는 바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과 구지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이제는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남에게 무엇인가를 보일 수 있는 자 신감 이 있는 인성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 문무영교사

    학년의 시간은 추점제의 입학이 되면서부터 비기독교인의 입학이 많아져 그런 학생들을 참 인성의 모습이 되게 하고 교회 생활에 익숙하게 하며 여학생의 정서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74년부터 중・고같이 시작되었다.

    많은 노래를 익히게 되어 학생들의 반응도 좋아졌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 할 수 있 도록 연구해야겠다. 충실히 시간을 이행하는 학생들의 태도와 많은 참여가 기대된다.

     

    * 박영숙 교사

    인생은 역시 노래의 산 표본이었다. 내가 인성의 여학생이었을 때의 합창부 는 60여명의 인원과 조동인 선생님의 지도로 대학가 주최로 열리는 많은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획득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진학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모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새벽시간을 활용하게 되었다. 이제 후배들은 인성의 교훈에 맞게 기독교인으로서 타교에 모범이 될 수 있는 여학생이 되었으면 한다.

     

    * 김인선 교사

    지금도 경기도 대표팀으로 활약하고 있는 농구부는 60년대 중학교 12명, 고 등학교 9명의 인원으로 그 당시도 경기도 대표팀이었다.

    그 때는 오락적인 면에서 기술면보다는 친목도모에 힘썼고 수업도 전부 다했지만 지금은 경기에 출전하는 빈도수도 높아지고 개인기도 향상되어 발전한 인성의 농구부가 되었다.

     

    * 김성분 교사

    지금의 작은 콘크리트 운동장이 옛 목조 건물의 도서실이었다. 20평의 작은 도서실에 장서는 천여 권, 좌석 30 여 석으로 이용도는 낮았지만 개가제의 아담한 소규모의 도서실이었다.

    그 후 네 번째로 이동한 현 위치의 도서실은 폐가제로써 현 장서는 만 권을 돌파하고 열람과 대출 이용자수는 10배 이상으로 매우 좋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용자 수는 월 평균 중학교 2100여명, 고등학교 1200명. 대출은 중학교 1500권, 고등학교 800권.

    “아줌마 책 좀 빌려줘요” 좀 당황해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아래 위 빨간 옷차림의 신입생. 어느 날의 일화였다.

    앞으로의 여러분은 어느 곳을 향 하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란다.

  • 합창대회 1977.05.06

    5월 4일에는 중학교가 6일에는 고등학교가 강당에서 반 대항 합창 경연대회를 가졌다.

    연습기간이 짧은 관계로 자유곡은 없었고 지정곡만 1곡씩 불렀다. 이 결과 중학교에서는 1등에 1학년 2반과 2학년 6반이 각각 차지하였 고, 고등학교는 2학년 5반이 1등을 하였다.

    이날 심사위원에는 권경호, 박영숙, 유명희, 오인옥, 전혜경 선생님이셨다.

  • 동창들의 활약 1977.05.14

    1977년으로 25주년을 맞는 제일학원은 중학교 23회 졸업으로 5894명, 고등학교 14회 졸업으로 3115명으로 총 900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해마다 개교기념일 전날인 5월14일 오후 5시 본교 강당에서 갖는 동창회 총회가 이해로 13번째 모임이다.

    이 동창모임에서 계획, 결정, 실행되는 사업으로는 모교의 운동부, 교내 행사 등을 찬조하고 장기근속 교사에게 기념품을 증정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기리며 불우한 졸업생 및 재학생을 위한 장학기금 마련 등 많은 일을 모색하고 있다.

    이렇듯 모교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는 동창 중에서 본교에 재직하고 있는 교사가 16분이나 된다. 고등학교에 윤희미자, 길춘희, 오문순, 박계식, 조성훈, 박영숙 선생님과 중학교에도 김복순, 오원자, 유명희, 김인선 교사가 있고 서무실에 임창숙, 김인용, 이상경, 이성우 도서실에 김성분, 나성숙 교사로 선배로서의 모범을 보이므로 후배들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도 인성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1979년 5월 15일 개교 27돌 때는 동창회 임원개선이 있었는데 신임 회장에 임창숙, 부회장에 길춘희, 총무 나월선, 서기 김인선, 회계 이상경 선배가 선출 되었다. 최선옥, 조성훈 선배에 이어 제3대 동창회장으로 선출된 임창숙 선배 는 그 해 사업계획 중 농구부 기금 목표액을 2백만 원으로 세우고 모금 중이라고 했다.

  • 시화전 1977.05.14

    5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 체육관에서 개교 25주년 기념행사로 중․고 등학교 시화전이 있었다.

    해마다 열렸던 행사이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한 관심 속에서 중학교 1학년 6점, 2학년 21점, 3학년 4점으로 총 31점과 고등학 교 1학년 8점, 2학년 10점, 3학년 8점의 26점, 총 57점이 체육관 복도에서 소개되었다.

    작년에 비해 무게가 있어 보이는 액자보다는 대중적인 영향에서인지 판넬이 많았고 소재는 주위에 있는 사물에서 택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관람하는 학생들의 태도도 작품을 출품한 학생 못지 않게 진지하였다.

  • 미전 1977.05.14

    5월 14일부터 18일에 걸쳐 본교 체육관에서 중․고등학교 개교기념행사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작품으로는 동양화, 유화, 수채화, 구성, 서예의 다섯 부문을 통해 총 40여 점이 전시되었다.

    결과로는 바자회, 시화전, 미전을 함께 했기 때문인지 전시 상태가 무척 볼 만 하였으며 특히 서예 부문에서 매우 좋은 작품이 출품되었고 구성에서는 높은 수준의 작품이 많이 나왔다. 소재가 다양하고 풍부하며 대체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 바자회 1977.05.14

    5월 14일 본교 체육관에서 바자회가 열렸다. 우중(雨中)에도 불구하고 많은 손님들이 오셔서 작품을 보아주셨다.

    작품으로는 중․고학생들이 그동안 준비한 쿠션, 병풍, 장갑, 벽걸이용 조화(造花), 레이스, 털스웨터, 스킬동양자수 등 약 500여점이 전시되었다.

    특히 동양식 침구와 서양식 응접세트를 분리 배열시켜 놓은 것은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판매 품목 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쿠션, 방석이었고 총 판매금은 약 30만원쯤 되었다.

    총 이익금은 44,580원으로 우리의 가정관 건립비와 장학금으로 쓰기로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바자회의 작품 수준이 높았으며 성과는 매우 흡족하다고 말씀하셨다.

  • 교지 15호가 특집으로 발간되었다. 1977.05.14

    성인(成人)으로 성장한 인성(仁聖)재단 학생답게 개인적으로나 학생 일원으로서 바람직한 학생상을 새롭게 알려 이에 가까운 인격(人格)으로 성숙 되도록 부탁한 내용이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① 쓸모가 있고 슬기로운 여성

    ②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며 적응성 있는 체력의 소유자

    ③ 구실을 다 할 수 있는 시민

    ④ 가정생활의 건전성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

    ⑤ 과학적인 지식과 방법을 실생활에 적용할 줄 아는 사람

    ⑥ 아름다움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

    ⑦ 여가를 선용할 줄 아는 사람

    ⑧ 남을 아끼며 윤리적인 가치와 협동성을 존중하는 사람

    ⑨ 선한 생산자와 지혜로운 소비자

    (2) 또 특집으로 설립자 이기혁 목사님의 글과 4반세기 인성인의 새 좌표에 대한 사제간의 좌담회를 소개한다.

  • 체육대회 1977.05.19

    1977년 5월 16일과 19일 교내 운동장에서 고등학교 중학교의 체육대회가 열렸다. 중학교에서는 14일이 대회 예정일이었으나 비가 오는 관계로 19일로 연기 개최되었다.

    이 날 고등학교는 청군과 백군으로, 중학교는 개구리, 다람쥐, 산토끼, 바둑이, 고양이 팀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작은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가진 경기였고, 소운동회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질서가 좀 혼란하였으나 학업에만 얽매여 있다가 마음껏 뛸 수 있는 기회를 맞은 학생들은 자기가 소속된 팀의 승리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응원하는 열의를 보였다 .

    선생님과 학생들의 계주 때에는 사제간의 흐뭇한 정(情)을 느낄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의 ‘비상’경기에서는 우리의 민첩함과 반공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결과로는 고등학교에서는 청팀이 중학교에서는 개구리 팀이 각각 승리를 거두었고 정리 운동과 함께 체육대회를 마쳤다.

  • 경기도 음악․무용 경연대회서 본교생 최우수상 수상 1977.07.04

    1977년 7월 4일과 5일 양일에 걸쳐 있었던 경기도 중등학교 음악, 무용 경연대회 예선에서 합창 부문에서 고등학교가 최우수상을, 무용 부문에서는 중 학교의 황상호양과 고등학교의 황미란 양이 각각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9월 29일과 30일에 경기도 교육위원회 주최 음악, 무용 경연대회 본선이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강당에서 있었는데 이는 인천시, 수원시, 성남시, 의정부시에서 예선을 걸쳐 올라 온 팀들이었다.

    합창은 각 시별로 1팀씩(인천시 두팀) 참가하여 시지역을 1부로, 군․면지역을 2부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고등학교는 지정곡 「새 몽금포 타령」 자 유곡「우리 눈 여소서」로 1부에 참가하여 안양여고에 이어 2등을 차지했다.

    또 30일에 있었던 무용대회에서는 중학교 1학년의 황상호양이 「종달새」로 3위를 차지했고, 고등학교 3학년의 황미란양이 「움트는 날」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 수학여행- 설악산 1977.10
  • 제58회 전국체전 농구부 동메달 차지 1977.10.10

    강화도 마니산에서 점화, 마라톤으로 고수된 봉화가 전날 광주공설운동장에서 타오르기 시작함으로써 제58호 전국체전의 막이 올랐다.

    현란한 카드섹션, 입장식, 젊은이들의 약동하는 힘의 조화를 보여주는 마스게임으로 개막된 전국체전에 본교에서는 농구부가 출전하여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번 경기는 10월 10일부터 15일 까지 6일간에 걸쳐 광주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진행 되었는데 11일에 있었던 춘천여고와의 경기에서는 61:51, 12일의 청주여고와의 경기에서는 61:59로 각각 승리를 거두었으나 부산 동주여고 와의 대전에서 62:71로 분패, 동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주장 이미향 외 7명으로 구성된 농구 출전 선수단은 1학년의 경우 처녀 출전으로, 경험과 아울러 좋은 성과를 올렸다.

    소감으로 “동주여고와의 경기에서는 아깝게 졌으나 스포츠인으로서의 의지로 더욱 열심히 분발하겠다.”고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인솔하신 분은 고등학교 박계식 감독과 송기화 코치셨다.

    인천 농구부와 그 발자취

     

    <열 여섯 해의 각고, 63년 전국체전 첫 출전>

     

    1961년 가을 어느 날 본교 소 운동장에는 어느 한 목공의 손으로 규격도 맞지 않는 농구대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그 나무로 된 농구대가 닳고닳아 없어진 지 오래지만 그때 그 농구대를 세울 때 인성 농구부의 앞날에 영원히 발전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던 뜻 있는 분들의 염원은 이루어져 현재 인성의 자랑으로 농구부는 자라고 있다.

    1960년대 초 이동욱 교장․박원호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께서 농구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래서 이 분들은 방과 후 여분의 시간을 이용하여 자주 농구경기를 벌였다.

    농구부가 창설되기 일년 전 그때는 완전한 농구부가 구성되지 않고 특별 활동부서의 하나로써 담당교사는 조창호 선생님이셨다.

    그 후 일년 뒤 1961년에야 비로소 이형길, 정정해, 채화숙 등이 주동이 되어 그 외에 6~7명이 더 합하여 코치 선생님도 없이 자발적으로 농구부를 운영해 나갔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이 자기들 나름대로 꾸준히 연습해 나가던 이들에게 1962년 가을, 생각지도 않던 행운이 찾아왔으니 제1대 코치 박해성님께서 농구부를 전담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인성 농구부의 실제적인 창설의 역사가 되는 셈이다.

    1년 후 박 코치님의 열성적인 노력과 농구부원들의 땀 흘린 보람으로 경기도에서 우승을 하여 제42회 전국체전에 나간 것이 처녀 출전 때의 기록이다.

    1964년 1학년생들로만 구성된 고등학교 농구부가 창설되었다.

    고등학교 농구부 창설당시의 부원으로는 그 당시 명 가아드로 활약했던, 현 본교 고등학교 박계식 선생님 그리고 중학교의 김인선 선생님, 센타로서 인성 농구부 창설에 큰 활약을 보여줬던 이형길 선수(도중 덕성여고로 전향), 조춘애 선수, 김인영 선수 등이다. 특히 이형길 선수는 국가 대표 명 센타였던 박신자 선수의 후계자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고등학교 농구부는 구성된 지 1년 뒤부터 5년 간을 계속해서 경기도 대표로 전국체전에 참가했다. 제45회 전국체전에서는 중학교가 준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 1960년대 후반기의 화려했던 전적을 찾을 길 없이 5년 동안 계속해서 우승을 빼앗기고 1976년에 와서야 다시 옛날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농구부 창설 이래 가장 활약이 컸던 선수들이 현재 어떻게 지내는가? 정희숙 선수(센타), 손계영 선수(가드), 우진영 선수(포드)등 세 선수는 삼성 재단 농구부원으로, 이종숙선수(포드)는 조흥은행에 입단했으며 임명심 선수(가드)는 인천축현국민학교 농구부 코치로 활약이 대단하다

    현재 활약 중인 고등학교 선수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주장 이미향을 비롯하여 조영란, 고금자, 박인자, 안순훙, 안은희, 김유미로 농구부 창설 이래 가장 강한 멤버 구성이라 할만 했다. 제58회 전국 체전에서는 3위에 그쳤다.

    1년에 행해지는 고정행사로는 전국 종별 농구대회, 전국체전 예선대회, 우수교 초청 농구대회 등이다.

    당시 농구부 감독으로는 고등학교 박계식 선생님, 중학교의 김인선 선생님, 코치로는 송기화 님이셨다.

    눈이 오면 농구대가 젖을까 걱정되어 일찍 등교하여 농구대 주위의 눈을 쓸어 멀리 멀리 날려보내던 그때 그 선배들의 열정은 아직도 식지 않고 후배들에게 이어져 내려온다.

  • 1977년도 학교생활 1977.12
  • 성탄예배 1977.12.23

    양로원, 부대, 안내양들을 찾아서 오락, 선물, 다과로 즐거운 한때를

    1977년 12월 23일 본교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예배가 있었다.

    이 날「오암원」 에서 특별연주가 있었는데, 이 「오암원」은 홍성후 전도사님을 중심으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십 여 명의 맹인들로 구성된 맹인들을 위한 자활단체이며 교회․학교․교도소 등 전국을 순회하며 선교사업을 하는 이들이다.

    본교에서는 이날 추수 감사절 헌금 중 일부를 그들 선교사업에 써 달라고 전달하였다.

    성탄과 연말을 맞아 불우이웃을 돕겠다는 작은 뜻들이 있어 중․고에서는 각각 여러 가지 활동이 있었다.

    먼저 중학교에서는 전교생이 쌀 한 봉투씩을 모아 본교 학생 7명에게 20kg 씩을 전달하고 걸스카우트의 봉사활동을 위해 20kg, 선린원에 70kg을 전달 했다.

    반면 고등학교에서는 각 반의 위문이 많았는데 1학년 1반은 선린원을 2반은 서해안 경비를 맡고있는 ○○부대를, 3반은 제물포여객의 안내양들을, 4반은 가난한 할머니를 찾아갔고, 2학년에서는 4반이 성나자로 마을을 방문하여 준 비한 위문품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또한 합창부에서도 12월 23일 서곳에 위치한 3533부대 3대대를 방문하였는 데 작년에 이어 세 번째 국군 장병을 위한 위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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