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학원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961년 2월7일 이사진들의 끈질긴 노고로 인성여자고등학교의 인가를 얻을 때는 중학교는 이미 12학급의 증설인가를 받고 있었다.
인가된 고등학교 6학급까지 합하면 인성仁聖)은 18학급의 당당한 학교로 성장하면서 더욱 교육의 내실화에 힘썼다.
고등학교 초대교장은 중등 교장 직을 맡고 있던 이동욱 교장이 겸직하게 되었다.
제1절 교육의 기저(基底)
인성교육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이기혁 목사의 신앙과 인격은 그 지표가 되었다. 인성 교육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존재와 인류 구원의 경륜을 신구약 성경에서 찾았고 창조주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요 주인임을 믿는 교육이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 을 믿으며 그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신앙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육이었다.
그리스도가 세운 교육의 권위와 사명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건설적 헌신적 봉사의 일원이 되도록 독촉하는 교육이었다. 하나님이 창설하신 가정을 존중하고 가정이 인간 성장의 모반(母盤)임을 인식하도록 하는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으로 이웃과 화목해야 하 는 계명(誡命)을 가르치는 교육이었다. (인천제일 제11호 28쪽에서 발췌)
제2절 교직원 조직과 교육 과정
이제 명실상부한 교육을 위해 여러가지 면에서 체재가 정비되어 갔다. 중학교가 병설(倂設)되어 있으므로 조직은 일원화(一元化)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교장도 수업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체제로써 교감이 부재(不在)였고 기독교 학교답게 교무분장에 종교부가 있고 교과과정 시간 배당에 성경과목이 있었다.
이들 교사 중엔 1957년 백운기 교장과 더불어 대구에서 올라온 교사 외 인천에서 합류한 여러 교사들이 대부분으로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인성 초창 기의 초석이 되었다.
1961학년도 교과과정표와 주간행사표를 보면 정규 교과와 예배 및 특별활동 과정이 충실히 이행되었다.
여기서 특기한 것은 학년별 반(班)편성을 일반학교에서 구분했던 1,2,3 반으로 하지 않고 ‘송반(松班), 매반(梅班), 죽반(竹班)으로 나누었다. 이는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四君子)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라 여긴다. 중1학년에 1학급이 더 늘면서 ‘유’반이라 했다. 결국 송(松),매(梅), 죽 (竹), 유(柔)의 네 반인 것이다.
제3절 교기 제작
- 인성여자중․고등학교 교기
본교의 교기는 1961년도에 제작되었다. 바탕색은 보라색으로 테두리에 은색을 둘렀다.
제일학원 명의의 송현동 산(山) 삼천여 평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거기엔 수백 세대의 무허가 건물이 난립해 있어서였다. 하나님의 손은 바로 여기에 역사해 주셨으니 5.16 군사혁명 직후 인천 시장을 역임한 유승원 씨가 송현동 제일학원 소유지상건물 거주자들에게 건물대지를 분양해주고 한편 제일학원에는 대체 토지로 인천시 소유 구(舊) 공동묘지 11,400평 매입을 주선해 준다는 묘안을 제기해 왔다.
이기혁 목사는 즉각 응락했다. 절차는 매우 복잡하였으나 인천시 당국의 협조와 송현동 주민들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제일학원은 공동묘지를 송현동 토지 분양 대금으로 매입할 수 있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과의 접촉은 서무실에서 정용욱 장로가 담당하는 수고를 하였다. 이 사업의 배후에서 지혜를 준 분이 최종현 장로다. 그는 유승원 씨의 보좌관으로 청와대 민정 수석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학교법인 재단 설립과정에서 도움의 손길을 준 분들이 또 있다. 서울 영등포 소재 금강융단 주식회사의 이안기(李安基) 사장이 전술한 이기렴 씨를 통하여 상업은행으로부터의 공동융자를 제안해 왔다. 금액은 이천이백만원 이었다.
제일학원 ,인성학교, 다비다 모자원이 점유하고 있던 귀속재산(歸屬財産)인 토지와 건물을 일괄 매입하여 각각 재단을 형성할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이희영, 염태운 장로와 선우 황 권사가 적극 찬동하여 절차는 복잡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교회 부지(敷地)는 교회로, 모자원 부지는 모자원으로 인성학교 부지는 제일학원으로 각각 분할 등기할 수 있었다. 이일에는 상업은행 인천지점 이우선 차장과 관재청 경기도 지부장 송광준 씨의 수고가 큰 도움이 되었다.
금강융단 주식회사의 이안기 사장은 자기 지분 일천이백만원을 최종회까지 착오없이 지불했고 제일학원은 학교의 자금으로 연차 계획을 세원 전액을 완제 (完濟) 할 수 있었다.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1963년 11월 제3공화국이 탄생된 때가지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이 군사혁명의 시기에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 중에서 1961년 8월 12일에는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의 입학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 공포하여 입학 시험의 국가 관리제를 시행하였다.
이는 국가가 대학 입시를 관장하여 대학 입시(入試)에서 학과(學科)를 선택하여 전형 을 하는 방법을 채택하였으며 사범학교를 페지하고 교육대학을 신설하였고 교원의 세대교체를 위해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단축하는 등 일련의 쇄신책을 발표하여 시행하였다. 그러나 국가고사제는 그 다음해에 입학자격만을 관리하는 제도로 바뀌었고 교원의 정년도 다시 65세로 환원되었다.
제1절 교지 ‘인성(仁聖)’ 창간호 발간
이러한 와중에서도 인성교육의 기저(基底)는 흔들림 없이 운영되어 1961년11 월30일 인성문예반에서는 중・고등학교를 통합하여 교지(校誌)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국판 182쪽으로 인쇄와 제본을 삼영(三榮)인쇄주식회사에 맡겨 당시로서는 어느 학교의 교지 못지 않게 알찬 내용으로 빛을 보았다.
창간호의 표지 그림은 미술과 황영희 선생이 맡았으며 목차는 허경화 국어 선생이 꾸몄다.
창간지면(創刊誌面)을 보면 이동욱 교장님의 격려사가 앞머리에 실렸고 교사 논단, 학생들의 산문과 시 꽁트 일기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해 수록하고 있다. 특별히 첨부한 글들「나는 인성을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당시 교육감 이셨던 최봉칙씨의 글과 인천중학교 이준경 교감 선생의 글이 돋보였다.
뒤쪽에는 인성여자중학교 동창회원록(同窓會員錄)으로 제1회에서 7회 졸업생 명단이 수록되었다.
『인성』창간호 표지
제2절 중․고교 학급 증설 허가
1962년 3월17일 고등학교에 3학급이 더 증설되어 9학급으로 늘었다. 중. 고 등학교 합하여 21학급이 되자 자연히 교실이 부족 할 수밖에 없었다.
제3절 1962학년도 교육의 내실화와 학생활동
지난해보다 교사 수가 7명이나 늘었다. 그 중에서도 시인 박목월 선생이 당신의 아들인 박동규(朴東奎)씨를 교사로 보내주었는데 박동규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셨다. 학생들의 활동도 활발하여져서 인성 중・고등학교 학생위원회 임원단이 발족했고 생활 지도부원들의 활동도 컸다.
제4절 신앙생활을 익히는 교육활동
매년 교육계획안에 세워지는 일반계 학교와 다른 행사와 활동은 예배활동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교육의 일환이었다.
⑴ 학급예배-매일 조 종례를 통하여 학급학생들이 순서를 정하여 예배를 드리며 찬송과 기도로 하루를 열고 마감한다.
⑵ 학교예배-전교생은 매주 1회 화요일에 예배당에서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서 예배를 드린다.
⑶ 부활예배-부활절 즈음에 드리는 예배로 전교생은 성구(聖句)를 써넣어 채색한 삶은 달걀을 준비하여 서로 나누며 교도소나 양로원, 고아원에 보내 어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한다.
⑷ 교내부흥회-매년 봄에 1회 외부강사를 모셔와 2일간의 부흥집회를 갖는다. 전(全) 교직원과 전교생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부흥회는 각자의 믿음을 재점검하여 새롭게 성령(聖靈)으로 무장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으로 삼았다. 이 기간을 통하여 새로운 학생 신자를 얻고 학습과 세례식도 갖는다.
⑸ 헌신예배- 연 1회 하기 방학 중 봉사활동을 위한 헌신예배를 드리고 정성 껏 모은 헌금을 바침으로써 봉사활동 기금을 자발적으로 조성하기도 한다.
⑹ 추수감사예배-가을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마음껏 뽐내며 감사하는 행사들이 가을 축제가 되었다. (설교 대회, 반 대항 합창경연, 배구대회 등이다)
⑺ 성탄축하예배-매해 성탄절이 되면 으레 드려지는 이 행사는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축하하는 예배로써 이때 드린 헌금은 불우이웃 돕기 기금으로 쓰여졌다.
⑻ 하기 봉사활동-여름방학 중에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나 개척교회를 찾아가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위해 봉사하는 값진 체험을 하게 함으로써 희생과 사랑의 실천이 복음 전파의 소중한 길임을 깨닫는 기회로 삼았다.
1960년도에 시작된 하기 봉사활동의 첫 봉사지는 인천남촌교회(예장)로 현재 까지 수 십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인성의 전통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1963년 12월1일 구월 2동 성말 교회 첫 개척예배에 참석하였고 1964년에 주안 석바위 근처 남의 집 사랑방에서 교회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때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에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조를 짜서 교회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였는데 이것이 석바위 장로교회의 시작이다.
제5절 2차 고등학교 신관 기공식
1962년9월19일 부족 교실을 면하고자 2차 교사 신축을 목적으로 철근콩크리 트 5층 18교실 규모의 교사(校舍) 기공식을 가졌다.
- 고등학교 신축교사(후에 초등학교 교실로 쓰다가 허물었다.)
중・고교의 학급이 계속 증설되고 이를 수용하기 위한 교사(校舍) 증축이 한창인 가운데 숙원(宿願)이었던 국민학교의 인가까지 받았다.
이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기혁 목사가 세운 성경 구락부, 무궁화 공민학교가 인성국민학교의 태동을 위한 전초적 역할이 되었음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 과정을 돌이켜본다.
1950년대 8월20일 이희영 장로 후임으로 무궁화공민학교 교장에 취임한 선우 황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였다. 그는 무궁화 유치원 원장시절 같은 울타리 안에서 당시 무궁화공민학교 교장이던 이희영 장로와 함께 교육에 열을 올리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공민학교 교육에 혼신의 정을 쏟았으나 교실의 부족으로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인성여자중학교가 학급이 증설됨에 따라 공민학교 교사(校舍)를 몽땅 중학교에 내어주고 대신 여중(女中)에서 사용하던 구교사(舊校舍)를 사용하면서 콩나물 교실 신세가 되어서다.
당시 공민학교 학생들이 상급(上級)학교에 진학하려면 자격검정고시(資格檢定 考試)에 합격해야만 응시할 수 있었다. 그 고시는 해마다 12월에 실시되었다. 응시 장소는 시내에서 지정된 학교이지만 해마다 장소가 바뀌었다. 응시 장소 가 어디이든 추운 겨울 치러지는 곳의 난방시설이 엉망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열 서너 살 아이들을 앞세우고 응시 장소로 가야할 때마다 선우 황 교장은 가슴이 아팠다. 그 애들의 상처받는 자존심이 당신의 경우처럼 느껴져 어떡해서라도 국민학교 인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어린 시절에 당하는 저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면 정규 국민학교 인가를 받는 길뿐이었다. 당회장 이기혁 목사와 의논하여 인가에 따르는 모든 서류를 갖추고 인천시에 국민학교 인가 신청서를 냈으나 자꾸 지연되자 선우 황 교장은 1962년 12월27 일 경기도 지사를 직접 찾아가 사유를 설명했다. 그 해는 5.16혁명 당시라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민원(民願)은 속결(速決)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나흘만인 1962년 12월31에 마침내 국민학교 인가를 받은 것이다. 선우 황 교장을 위시한 공민학교 전교사의 혼연일치(渾然一致)된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었다. 이는 무궁화공민학교의 종막(終幕)이나 교명(校名)과 형식만 바뀌었을 분 거기에 살아있는 정신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제1절 인성국민학교 개교 및 첫 입학식
1963년 3월2일 6학급을 편성하여 교장 및 교직원 7명이 300여명 신입생을 모아놓고 개교식 및 첫 입학식을 가졌다. 그리고 1964년 2월 19일 제1회 졸업생을 내면서 그야말로 국민학교의 성장은 문자 그대로 일취월장(日就月將) 하였다.
초대교장은 선우 황 교장이었다.
제1절 재단법인에서 학교법인으로
1963년 6월에 사립학교법이 제정, 공포됨으로써 종래의 재단법인이 학교법인으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본 제일학원에서도 1963년 6월 5일 학교법인 제일학원을 발족시켰다.
이사장: 이의영 (제일교회 장로)
이 사: 김문영, 권세열
감 사: 염태운, 한태준
제2절 중․고교 학급 증설 허가
신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1963년 12월6일 중 고교 모두 3학급씩 증설인가 되어 중학교 15학급, 고등학교 12학급 합하여 27학급으로 늘어났다.
1. 1963학년도 중・고등학교의 대외 행사에서 얻은 실적을 열거하여 보면 교육 활동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4.24 인천신문사 주최 무용 콩쿨(3위)
5.23 제1회 경기도 예술제 참가(합창1위-고등부 /피아노 1위/ 독창 2,3위)
6.8 인천시 5・16 기념 농구대회(우승 중등부,고등부)
6.15 인천신문사 주최 제1회 경기도 백일장 대회(수필부 중1,3위 2명. 가 작 2명)
6.27 제1회 인천 학생 농구 경기종별 리그전 (우승- 중등부)
7.11 고등학교 합창부 KBS-TV에 출연
8.5^10하기농촌봉사활동(학생25명 교사 명)
9.7 전국체육대회 경기도 예선 -농구부(우승-중. 준우승-고)
10.4 전국체육대회 원정- 중학교 농구부(전주)
10.10 ‘세종문화 큰잔치 음악의 밤’에 고등학교 합창부 출연
10.27 학교 심사(경기도)
11.20^12.5 개인시화전(고3 장명자-시립 박물관 인천 문화원에서)
12.1 구월2동 성말 본교(개척교회) 첫 예배참가
12.10 본교 사생과 연구 발표회(경기도)
합창부 KBS 방송출연
농구부 사진
사생대회 사진
제2절 다듬어지는 교내 행사
1. 환경심사
신학기가 되어 새 학년으로 진급하면 담임도 교실도 바뀐다. 자연히 새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환경정리를 한다. 매 학기초마다 새로 단장하는 환경미화심사에서는 각 학년에 한 반과 전체에서 종합 우승반을 선정하여 상장과 상품을 주었다.
2. 어머니 날 기념행사
어머니날을 맞을 때마다 본교 재학생의 어머니 중에서 모범 어머니를 추대하여 표창하고 기념품 증정과 장기(長技)놀이 대회를 벌였다. 이 행사를 통하여 학생들은 자기를 낳아 키워주신 어버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고 부모님들도 자기 자녀를 통하여 가정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이 지식(知識)의 근본임을 깨닫는 소중한 계기이기도 했다.
제1절 교육자 양성을 위한 첫걸음
1. 이동욱 교장 도미(渡美)유학 길에 오름
이로써 인성제일학원의 모습은 초중고교를 고루 갖춘 배움의 터전으로서 손색 없이 발전 일로를 걷고 있을 때 이기혁 목사는 장차 기독교 대학을 세울 꿈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 여자대학을 끌고 나갈 지도자 양성이 필 요했다.
그리하여 학급과 학생수가 늘고 교실 신축을 위한 여러가지 사안들이 넘쳐 날 때임에도 당시 중・고등학교와 국민학교 교장까지 겸임하고 있던 이동욱 교장을 미국으로 유학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유학의 길이 트이자 이기혁 목사는 서둘러 떠나게 했다. 1964년 6월 13일 많은 교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도미 유학의 길에 올랐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Tulsa) 대학에서 기독교 대학에 관한 교육과정을 연구하는 것이다.
몸은 미국에 있었어도 마음은 항상 인성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학교의 영선주임이던 이상수(李相洙)씨는 건축의 전문적인 조예(造詣)가 있었고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 믿고 유학의 길에 올랐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축 공사장에서 박원호, 정용옥, 김덕용 등과 가마니를 깔고 밤을 지새던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공부를 마치고 인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교회와 모든 이들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 밤잠을 줄이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성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보내곤 하였다.
이렇듯 애틋한 사랑으로 인성을 사랑했던 이 분은 드디어 교육학석사학위를 획득하고 1966년 2월12일 귀국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학기를 앞질러 학위를 수여 한 것이다.
ㅡ 교장선생님 떠나시던 날 김포공항에서의 사진
- 미국에서 친지들과 찍은 사진
2.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처음으로 제작되었다.
국판 크기에 37쪽으로 졸업반 학생들의 일년간의 애환의 추억이 생생한 기록으로 보여졌다.
제2절 알찬 인성의 기틀
1. 1965학년도는 오랫동안 열망하며 꾸준히 노력해 왔던 국민학교 인가까지 받으므로 한 울타리 안에 초․중․고 교육을 단계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기틀 마련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 교육의 뿌리가 점점 깊이 내려지는 전망을 보여준 뜻깊은 해였다.
- 1965년의 교직원 사진
중・고교의 교과목 담당 교사 수는 예년과 같으나 정교사가 6명, 강사가 1명 줄고 대신 전임이 7명으로 늘었다. 즉 정교사 20명, 전임11명, 강사 4명, 농구코치1명, 서무직원 6명으로 조직되었다.
2. 새로운 써클활동반으로 M.R.A 반이 생겼다.
3. 해마다 확대되는 하기 봉사단 활동
이미 1960년 여름방학부터 시작된 하기봉사단은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 열기가 가해져 갔다. 이들 봉사대의 임무는 단순한 농촌계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통한 사랑의 이웃돕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거기다가 그 지역에 대한 학술조사까지 마치는 등의 학구적인 열성은 참으로 모범적이었다.
4. 인내와 노력의 결실들
대외적으로 농구부, 합창부, 문예부, 무용부가 각종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입상자를 냄으로 학교의 명예를 높인것은 예년과 다름이 없다. 여기에 중학교 미술반이 경기도 미술협회 주최 그리기 대회에 참가하여 특선 1명, 입선 5명의 영광을 안았다.
5. 제2회 ‘만추서정’ 문학의 밤에 초대 강사로 우리나라 문학사에 이름이 올라 있는 박화목, 시인 모기윤 님을 모셨으니 당시 인성의 문학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6. 설립자 이기혁 목사의 도미(渡美) 환송 예배가 5월 14일에 있었다.
제3절 시설의 확대
1. 인성국민학교 학급 증설 허가
다시 1965년 3월19일 학급 증설 허가를 받았는데 이는 12학급 인가였다.
1966년 1월2일 학교의 더 큰 발전을 위한다는 뜻에서 선우 황 교장과 선우 만국 교감이 사임하였다.
1966년 3월 2일 새 학년을 맞이하여 인성여자중・고등학교 이동욱 교장이 국민학교장까지 겸임하였다.
2. 신관 준공식
이동욱 교장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는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고 두 달 후인 1966년 4월30일에는 5개년간의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정대로 5층18개 교실이 완공을 보게 되었다. 총 공사비 1천 6백 만원이 소요된 큰 공사였다.
또 1967년1월1일 8개 교실을 증축 완공하여 교실 수는 총26개가 되었다. 모두 합한 총 공사비는 약 3천만원으로 매우 싸게 든 공사라는 평판이 있었다.
3. 교사 신축에 공헌한 사람들
2차 3차에 걸친 교사 신축은 연차적으로 시공하였다. 단기 완성은 자금 사정이 어려워서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교사 건축에 공헌한 이들이 많았 다. 그 중에서도 서울 새문안교회 임급주(林級周) 장로는 2차 3차에 걸친 공사의 설계와 감리를 해주었다.
건축 현장을 맡았던 서무과의 이상수씨는 열성을 다해 물자 구입에 특별히 심혈(心血)을 기울여 양질(良質)의 자재를 가장 싼값에 구입하여 공사비 절약에 공헌하였다. 그는 사실상 학교 재산을 형성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
정용욱 장로는 자금 관리에 충실하였고 김윤신 장로는 현장에서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항상 주머니를 털었으며 젊은 김영남 집사는 건축 현장에 나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니 이들 모두가 ‘죽도록 충성하라’하신 성경 말씀을 따른 참으로 크리스챤의 귀감(龜鑑)이라 하겠다. 이뿐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건축 중 재학생들은 귀한 시간을 할애하여 벽돌을 옥상으로 운반해 주었다.
당시 교육감 홍낙선(洪樂善)씨와 관리국장 주수웅 씨는 직접 간접으로 학교 운영의 힘이 되어주었다.
이렇듯 수년간에 걸쳐 공사가 이루어졌음에도 한 건의 인사 사고가 나지 않았고 부채도 없었다. 이기혁 목사는 기도실과 현장을 수시로 왕래하였다
제4절 본교생들의 정직성의 일화
당시 기차 통학을 할 경우 한 달 별로 통학권을 사야했다. 그런데 동인천 개찰구 직원들은 인성학교 여학생이 내보이는 통학권을 보려고도 아니하였고 어느 때는 그 표를 제시하지 않고도 그냥 통과되었다. 이는 인성학교 학생들의 정직성을 믿어서였다. 사실상 학생들은 스스로의 양심적 행동에 자긍심을 가졌고 이런것들이 역원(驛員)들의 눈에 비쳤을 것이다.
제5절 교육환경 개선과 특별활동 부서 확장
1. 1966년은 현대식 신축교사도 마무리되어 복(福)된 교육 환경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2. 특별활동 부서가 확장되어서 기존에 있던 문예반, 미술반, 합창반, 음악반, 배구부, 농구부에 이어 빙상부, 탁구부 서예반 생물반, 화학반 등이 신설되었다.
3. 고등학교에 이어 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앨범도 제작되었다. 거기엔 특별 활동 부서인 문예반, 생물반, 물상반, 미술반, 주산반, 농구부 등의 활약하는 모습과 어머니날 기념 행사, 속리산 수학여행의 즐거움이 담겨 있다.
제6절 기독학생회 주간 행사
1. 66년 5월15일. 기독학생회 주간으로 스승의 날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스승 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라는 스승의 날 노래가 온 교정(校庭)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학생들은 준비한 카네이션을 선생님 가슴에 달아드리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했는데 이 행사는 73년 스승의 날이 폐지될 때까지 매년 계속되었다.
2. 또 학생회가 주체가 되어 벌인 ‘바른생활 캠페인’은 하나님이 주신 선(善) 한 양심(良心)의 회복과 바른 행동의 습관을 실천함으로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의지(意志)였다.
제1절 내실을 다지는 교육과정 운영
1. 문교부령에 의한 시간 배당 기준에 따라 수업 및 특별활동을 합하여 중학 교는 주당 35시간, 고등학교는 37~39시간을 배당했다.
2. 각 교과의 과정이나 특별활동의 영역별 지도내용에 대하여는 교과서의 내용과 교사의 창의적인 학습지도안이 활용되었다.
학교 규모가 커지면서 교장은 학교경영에만 전념하도록 수업은 맡지 않았 다. 또 1961학년도에 교무주임이었던 박원호 교사가 1962학년도부터는 교감으로 승진되었으나 수학과 수업은 여전히 담당했다. 교무주임으로 영어과 김덕용 교사가 임명되었다.
3. 교직원 수도 많이 충원되어 교장, 교감외 교사 26명, 전임이 4명, 강사 5 명, 서무직원 6명에 농구 코취 1명을 포함하여 모두 44명의 대가족이 되었다.
교과목 담당교사의 수(數)는 성경 2명, 국어과 5명 사회생활과 6명(공민 2 명, 지리 2명, 역사 2명), 수학과 4명, 과학과 4명(물상 1명, 화학 1명, 생물 2명), 체육과 2명, 음악과 2명, 외국어과 6명(영어 5명, 독일어 1명), 미술 1명, 상업 1명, 가정과 3명으로 모두 36명의 교사가 각 교과를 가르쳤다.
4. 졸업반 담임 교사는 아래와 같았다.
반 |
중학교 |
고등학교 |
3의1 |
김명숙 |
조창호 |
3의2 |
장재영 |
강혜심 |
3의3 |
허경화 |
최준희 |
위에서 보듯이 전(前) 학년도에 ‘송,매,죽,(유)’ 반(班)으로 나누었던 것을 일반학교의 경우처럼 1,2,3반으로 편성하였다.
이 해에 2회 째 고등학교 졸업생 수 162명을 내면서 대학 진학지도와 취 업 지도방향에 힘썼다.
제2절 개인기 신장을 위한 특별활동 운영
특별활동 면에서도 여러 대외행사에서 얻은 실적이 보여주듯이 무용반, 합창 반, 문예반, 농구반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농구부의 활약이 화려한 전적(戰績)을 쌓아 나갔다.
1. 농구부의 활약
대외적인 농구부 활동일지를 보면 4월20일 제10회 경기도 체육대회에 출전 한 것을 비롯하여 5월31일 제2회 경기도 농구대회에 중・고등부 참가하여 모두 우승했고 6월27일 전국 체육대회 경기도 대표 선발 팀으로 나가 중・고등 부가 함께 우승하여 학교의 명예를 높였다.
7월 27일 제12회 전(全) 인천 종별(種別) 농구대회에서도 역시 중・고등부 우승하였다. 이들 농구부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8월 5일부터 10일간의 합숙 훈련으로 들어가 9월3일에 있을 제 45회 전국 체육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출전할 준비를 했다. 여기서 여자 고등부가 3위에 입상했다.
2. 문예부 활동
⑴ 5월 30일에 문학 콩쿠를 자유공원에서 가졌고 6월2일에 문예부 주최 교양강좌를 열었다. 강사는 우리나라 시단(詩壇)의 거목(巨木)이신 박목월(朴木月) 선생님이 ‘시(詩)의 이해와 작법에 대하여’ 라는 주제로 학생들의 마음에 시심(詩心)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 박목월 선생님 문예강좌 사진
이 행사가 12월 4일 제 2회 문예부 주최 교양강좌로 이어져 유명한 소설가이신 전광용 선생님을 강사로 모셨다. 주제는 ‘한국 현대문학에 대하여’였다. 책으로만 읽었던 작가를 직접 뵙고 그 분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당시 황폐했던 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참으로 귀한 만남의 추억이라 할 수 있겠다.
⑵ 6월12일에 제2회 경기도 백일장이 자유공원에서 열렸는데 본교생이 수필부문에서 고등부 2위, 중등부 장려상을 받았고
⑶ 6월15일 인천신문사 주최 제1회 경기도 백일장에서도 입상하였다.
⑷ 7월4일 경기도 문인협회 주최 백일장에서 수필2위(고등부) 장려상(중등부) 그리고 시조 장려상(고등부)을 수상.
⑸ 1963학년도부터 시작된 ‘만추서정’(晩秋抒情) 문학의 밤은 사춘기 여학생들에게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주는 밑거름이 되었고
⑹ 67학년도부터는 학교 신문도 제작되었다.
3. 무용부의 활동
4월24일 콩클에 출연하여 개인부가 입상했다.
4. 음악부의 활동
5월 29일 경기도 주최 제2회 종합예술제에서 고등부 독창 1위를 차지하였다. 다음7월11일에 고등학교 합창부가 전(前)해에 이어 두 번 째 KBS TV에 출연했다. 또 10월22일 인천신문사 주최 제5회 전국 학생 음악 콩쿨에 참가하여 고1 오영순이 성악부 3위를 하였다.
5. 도서부의 활동
점차 적극성을 띄면서 여름방학 무렵 도서부 지도 선생님을 모시고 도서부원 13명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을 견학하고 당시 유진오 총장님을 만났다.
4월에 도서부원들이 협력하여 당시 세계에서 많이 쓰는 D.D.C 분류법으로 도서정리도 하였는데 당시 고 2학년 도서부 학생의 논단을 읽어보면 그때의 본교생들의 독서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제3절 화교(華僑)와 사랑의 친교활동
특기 할 만한 일은 인성학교에서 멀지 않은 청관(淸舘)에 있는 ‘인천화교중산학교’(仁川華僑中山學校) 학생들과 본교 고등부 농구부와 친선(親善) 게임을 가졌다. 6월8일 있었던 이 게임에서 본교가 우승을 했으나 그 보다 서로 다른 민족간의 친화(親和)를 위한 모임이란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前) 해인 1963년 12월에 발간 된 ‘인성’ 교지 3집에 그 학교 교장님의 특별기고를 부탁한 데서 비롯된다.
인천화교중산학교의 장금종(蔣金鐘) 교장님은 쾌히 승낙하고 속히 옥고(玉稿)를 보내주셨다.
제4절 학생회 활동
이 부분에서 새롭게 시작된 것은 4월4일에 기독학생회 정.부회장 선거가 있 었다.
제5절 시설의 확충
1964년 7월23일 미(美) 원조 당국과의 신관교사 인계인수식이 있었다.
- 인계인수식 사진
제6절 하기 봉사활동
8월3일 해마다 실천되는 ‘하기농촌봉사대’가 3박4일 예정으로 경기도 고잔 지방으로 떠났다. 참가자는 교사 2명과 학생 7명이었다.
제7절 연례교육행사
봄 가을에 실시되는 재학생 소풍이나 졸업반의 수학여행은 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이 되었다.
제8절 교표(뱃지) 제작
학교의 모습이 여러모로 정착되면서 ‘인성’을 상징하는 교표가 도안 제작되 었다. 뱃지에는 인성 교육의 정신인 ‘신앙, 자유, 봉공’을 근저(根底)로 삼고 둥근 모양에 바탕색은 은색이다.
<모양>
중심의 작은 원 : 믿음(신앙-정신과 세계의 중심)
밖의 큰 원 : 진리(자유-영원성)
두 개의 S자 부분 : 받드는 두 손(봉공)
<색체>
선의 청색 : 소망(새로운 생명)
바탕의 은색: 사랑(맑고 밝음)
<인성의 상징>
교화 : 백 합
교목 : 은행나무
깔 :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