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짜 | 내 용 | 날 짜 | 내 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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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03.02 | 개학식 | 08.04~8 | 농촌 하기봉사 |
03.05 | 입학식 | 09.18 | 경기도 미술협회 미술대회참가 |
04.03 | 기독학생 회장,부회장 선거 | 09.28 | 수학여행 - 해인사 경주 |
04.20 | 경기도 농구협회 주최 농구부 출전-우승 | 10.09 | 전국체육대회 |
05.07 | 경기도 제11회 종합체전 농구부 참가 | 10.08 | 교내 백일장 |
05.09 | 어머이날 기념행사 | 10.26 | 전국 남녀 중·고 음악 콩쿨 대회-특등 |
06.22 | 경기도 종합 예술제 음악 콩쿨 | 11.06 | 제2회 만추서정 문화의밤 |
06.26 | 인천신문사 주최 경기도 제3회 백일장 | 11.09 | 교내 합창 콩쿨대회 |
06.27 | 인천신문사 주최 제4회 전국무용 콩쿨 참가 | 12.10 | 추수감사절 부흥회 |
12.12 | 추수감사절 예배,행사, 교내환경심사 |
고3. 이명자
우리학교의 연중행사의 하나인 하기봉사는 일반적 상념으로써의 농촌계몽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농촌계몽을 하기 전 우리는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 그들의 고달픈 생활에 위로를 주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한 다음 생활계몽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층 더 임무가 큰 것입니다.
이번 1965년 하기에는 두 팀으로 나누어 도서(島嶼)지방으로 봉사하러 나갔었습니다. 저희는 해로(海路)로 두 시간이 걸리는 무의도라는 섬으로 갔습니다. 이제부터 무의도에서 5박 6일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 보고 듣고 행한 바를 기록하려 합니다.
1. 인원구성에 있어서 선생님 두분(이기준, 허경화 선생님)과 학생 5명(윤정순, 김정자, 임원숙, 박순자, 이명자)으로 비교적 적은 인원 구성이었습니다.
2. 기일 : 8월 4일 오전 8시 출발해서 8월 9일 6시에 도착
3. 활동 목표
1) 교회 하기성경학교 인도
2) 전도 및 생활 계몽
3) 근로봉사
4) 지역사회 공익사업
5) 학술조사
이렇게 다섯 가지 활동 목적을 내세우고 갔습니다. 목표에 따른 활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기 성경학교
물론 가장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구세주를 가르쳐 주어 어 릴 적부터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 기일 : 4일 저녁(가던 날)부터 8일 아침 집회까지 하루에 두 번씩 했으 며 5일 저녁은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먼저 미비한 우리들이 배워야 했으며 간절히 기 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했습니다. 노래모음이란 작은 책을 200여권 만들었으며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는 엄 선생님과 이 선생님의 수고와 서무 실에 계신 문 선생님의 프린트 후에 저의들의 정성 어린 제안이 있었습니 다. 이 책을 위해 4일 동안 수고를 했으며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이 런 보람으로 기쁨을 맛 볼 수 있었으며 그동안 우리에게 좀더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쫑끗 입을 벌리며 허 선생님 지도 밑에 노래를 배우는 그들은 비록 헌 옷을 입었고 도시의 아이들과는 달리 모두 새까맣게 끄슬렀으며 더럽기도 했지만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였습니다. 흐뭇함을 금할 길 없더군 요.
대상지는 무의도 포내교회(김리교)였습니다.
교회 실정은 20년 역사를 지녔지만 금년에 야 교회를 건축했다고 하며 교 인은 40~50명 또 목사님이 안 계시므로 68세의 장로님께서 모든 것을 맡아 지도하시고 계시며 일요일 저녁에만 앞섬에서 전도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시는 형편입니다.
생활 시간표는 학교에서 다 계획한대로 실천했으며 전체적인 것은 오전 5 시 기상 시부터 오정 3시까지였습니다. 분주한 일과에 지쳐 코피를 흘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던 우리들의 목적의식 『예수그리스 도의 사랑을 가르쳐주자』는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집회시간에 있어서 아침집회는 8시 ~2시 30분까지 노래지도 예배, 분반공 부, 미술공부, 동화시간, 오락시간의 순서로 오전을 지냈으며 오후는 8시 ~9시30분까지 노래지도, 예배 성경퀴즈와 노래자랑, 연속동화의 순서로 메 꾸었습니다. 이 시간이 끝난 후 환등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많 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른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도 많이 나왔 으며 보통 때는 40~50명이던 것이 100여명이 되었다는 것이며, 하나 우리 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낮 집회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나오지 못했는데 그 들은 밭에 혹은 바다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마음 조이면서 저녁 때까지 안타까이 기다려야 했나든 것입니다. 빈곤이란 것 때문이겠죠. 매일 매일 늘어나는 학생수에 피곤함을 잊고 새날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들은 저희들과 매우 친근히 생활했기 때문에 우리들을 무척 따랐습니다. 치마폭 에, 어깨에, 손에 매달리며. 무척이나 그들은 사랑스럽고 귀여웠습니다. 특 히 감사하는 것은 그곳에는『생낌』이란 마을이 큰 고개 너머에 있는데 이 고개는 매우 높은 고개이어서 무척 오르내리기에 힘든 고개이나 어린이들 은 이 고개 너머에서 30~40여명이 나왔다는 것은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 습니다. 특히 우리가 갔을 때는 가던 날부터 폭풍주의보가 있어서 매우 비 가 자주 내렸고 그들은 우산도 없이 쪼르르 비를 맞고 그 어두운 꼬불 길 을 찬송을 하며 다녔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찬송을 하며 옛이야기를 나누며 그 꼬불 길을 오르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기 학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반사(班師)들과 청년들에게 계몽과 용기 를 주었습니다. 이기준, 허경화 선생님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합 니다. 특히 마지막 날 발표회 때는 많은 마을 민과 마을의 요지들까지 참 석한 가운데 마을의 축제와 같은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2) 전도 및 생활계몽
크게 세 마을로 나누어서 3일 동안 전도를 다녔습니다.
첫째 날, 가는 날 짐을 가지고 가면서 비를 쪼르르 맞으며 전도를 했고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싸 가지고 간 점심을 먹고 몇 명의 일행은 정리를 했으며 몇 명의 일행은 피곤함을 무릅쓰고 고개 너머 생낌이까지 다니면서 포스터를 부치며 전도를 했습니다.
셋째 날, 교회가 있는 마을 둘째 날은 저희가 가던 날이 너무 비를 맞은 탓으로 가방 속의 옥까지 흠뻑 젖어서 빨래난리 때문에 집회만 갖고 다음 날인 셋째 날 아침 집회를 마치고 전도를 나갔습니다. 3조로 나누어서 본 교회 교인들과 같이 전도지를 갖고 집집마다 다녔지만 거의 다 집이 비었 으며 어린이들 뿐이라 집에서는 별로 성과를 못보고 일터로 나가 밭을 매 고 풀을 뽑으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많은 곳으로 전도를 다녔지만 그들의 말은 일률적이었습니다. 『믿어야죠, 누가 하나님을 안 믿습니까 먹고 사느 라니 나갈 새가 없어서 그렇죠』 아니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까지 궁지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십니까?』라고 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하나 님을 믿으시고 한번 간구해 보셨습니까?』하고 되물을 뿐, 어떻게 해야 그 들에게 위로를 주어 그리스도를 알게 할 지 막연하고 답답할 때가 있었습 니다. 특히 선생님들은 동네 요인들 조합장, 반장, 이장들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드리며 우리가 온 취지가 무엇이라는 것을 인식 시켜주며 전도를 하셨습니다.
넷째 날, 이날은 전도와 마을 청소(소독)를 했습니다. 전도 결과 우리가 얻은 성과는 베드로와 같은 성과는 없었지만
가. 동리 사람들이 감사와 호감을 가졌으며 부모님들을 이 자녀를 직접 교회로 인도해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나. 지금까지 속회를 자기 집에서 못 보게 하던 호주가 보도록 허락을 한일
다. 어떤 청년은 전도를 받고 그 주일은 사정이 있어 못 나가니 다음 주 일부터 나오겠노라는 편지를 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생활계몽은 그곳의 환경이 정말 계몽을 받아야하는 처지도 아니며 또 그 렇다고 완전히 계몽된 생활도 아니며 마을민들의 인식이 계몽이라는 것에 좋지 않은 감을 가지고 있다는 교인들의 말과 여러 가지를 참작해서 별로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함에 따라 다른 종교의 세력과 생활고에 기진 한 교인들이 일대 용기를 얻었으며 자책감 같은 것을 토로하기도 하였습니 다.
3) 근로봉사
원래 인원이 적은 탓으로 손이 모자랐지만 교회환경, 길, 변소, 외양간 등 을 청소했으며 5~6명 학생들의 머리와 손톱을 깎아 주었으며 옷을 기워 주 는 일을 했고 불결한 학생에게 틈틈이 위생에 대한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하루에 오후 한 두 시간이나마 풀을 뜯어 주었습니다.
4) 지역사회 공익사업
이것은 여러분이 헌금한 돈으로 그 동리를 위해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해 주는 것인데 그 마을은 시내 학교와 결연이 되어 있는 마을이라 벌써 수년 전에 약 3만원의 거액을 희사해서 자동전기 시설을 해준 일(지금 쓰지는 못하지만)도 있고 또 우리의 적은 돈으로 적당한 일이 없고 또 교회건축이 아직 미비한 상태에 있는 고로 시멘트를 사서 교회 벽을 수리하는데 드렸습니다.
5) 학술조사
여러 가지 사소한 것은 많으나 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시간이 없는 고로 해야 할 조목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 모기가 다른 어떤 곳보다도 긁으며 침이 무척 강하기 때문에 옷을 뚫 고도무는 모기가 있는데 우리들은 더 조사할 수가 없었으나 생물반의 조사가 있으면 좋은 듯 합니다.
나. 벼에 대한 으로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고 있는데 얼마의 기간이 지나 서야 벼를 심을 수 있다고 들었을 쭌 별 조사를 못했습니다. 이것도 생 물반의 조사가 필요할 듯 합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도 에피소드가 있으니 김 양의 남자 같은 태도 때 문에 억압이나 된 양 청년들의 어휴~ 하는 한숨과 남의 청년 팔을 끌어 내서 벌을 주는 등 모두가 어색함 없이 자유로러웠던 일 등 더욱 잊지 못할 일은 우리들이 너무 수고했다고 하시며 오는 날 아침은 선생님들이 식사 준비를 하시겠다고 쌀을 씻으시며 불을 때시는 등 매우 분주했으나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그 알뜰한 솜씨의 감자볶음과 여러 가지 반찬 맛 이란 우리들과 견줄 것도 아니더군요.
아마 요리 강습소를 나오셨는지 학창시절에 자취생활을 하셨는지 사모 님께 배우셨는지...
우리일행은 모두 창조적인 인물들이다. 무슨무슨 주의 무슨주의 등 일 명 ○○파가 있었는데 경우에 따라선 참작하셔도 실수가 없으실 것입니 다.
누릉지파에 이기준 선생님(매일 태워야 했으니까요), 고추장파에 허경화 선생님 고추장께나 사랑하시더군요. 멸치파, 김치파, 국파, 감자파, 잡탕 파 등 저장고가 매우 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즐거웠던 일만은 아닙니다. 정말 표현 못할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가던 날 뼈 속에 스며들도록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꼬불 길을 한 시간 남짓 걷던 일, 도시에서 저희들을 보았더라면 이것도 여학생들의 멋 진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며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밥을 하면서는 매일 슬프 지도 않은 눈물을 흘려야 했고 천막으로 된 부엌이 바람이 불어서 날아 갔을 때는 솥을 옮겨 걸기까지 했습니다.
하루 4~5시간 밖에 수면을 취할 수 없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일행 중 코피를 흘리는 일도 있었지마는 전례 없이 감기하나 안 걸리고 소화기 고장하나 없이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또 잊지 못할 일은 어떤 날 있었던 일입니다. 작은 배를 타고 큰 배로 올라야 하기 때문에 작은 배를 탔는데 큰 배와 작은 배가 잘 조절되지 않은 운전 때문에 서로 부딪쳐 배웅 나온 교인이 물에 빠졌으나 다행히 별고 없었으며 우리 일행은 모두 배웅 나온 학생들에게 이별의 노래를 불러 주고 있을 때이라 너무 놀라 말을 못하고 창백한 얼굴만을 마주 쳐다보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일이 있었으나 주님의 보호하심과 여러 선생님들과 학 생들의 염려로 또 그곳 주일학생들의 따뜻한 전송으로 무사히 일을 마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들의 모습이 마음의 안타까움을 갖게 하곤 하는군요.
☞ 1965년 9월 28일 하기봉사에 대한 문답
문) 1. 대원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입니까?
답) 봉사대가 주로 하는 것이 하기성경학교 돕는 일이므로 하기 성경학교를 지 도 할만한 학생으로 구성하기 위하여 고2의 각반 종교부장을 임명하는 식으로 했습니다.
문) 2. 장소는 어떻게 택하는 것입니까?
답) 자립하지 못하는 교회가 있는 빈민촌을 택하는 것으로써 주로 개척지나 문 명의 빛을 못 받고 있는 곳.
물론 가기 며칠 전 답사를 하고 평가를 한 다음 우리가 요구하는 곳이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행사는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도움 없이는 행할 수 없는 것이니 더 많은 협조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