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학교의 태동기

  • 제1장 시대적 배경 1945.08.15

     

    1945년 8월15일. 꿈에도 소원이던 광복의 기쁨은 온 겨레의 가슴에 새로운 희 망으로 끓어올랐다. 허나 대한 독립의 성취 속에서도 한국민(韓國民)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좌(左), 우(右), 중(中)으로 삼분(三分)되어 그 세력의 확장에 힘을 쓰느라 사회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 아 남한(南韓)으로 내려온 이들이 많았다.

    해방은 되었다하더라도 이미 일제의 황국식민지 교육으로 모국어 사용이 금지 되었던 시대적 상황으로 대개의 국민은 문맹자가 허다했고 더욱이 기독교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탓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선교가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때문에 무지(無智)한 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잠재된 영혼을 깨워주는 일은 먼저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선각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각 영혼의 구원(救援) 사업을 위하여 우선으로 각자의 존엄성을 깨닫는 일부터 서둘러 계획하였으니 이것이 글을 배우고 익혀 스스로의 인격을 닦아나가는 길을 열어주려 함이었다.

  • 제2장 인성학교의 태동과 설립 1946.10.19

     

    제1절 제일장로교회로부터의 출발

    본교의 교훈인 ‘신앙, 자유, 봉공’의 뜻이 가리키듯이 인성학교는 교회로부터 출발하였다.

    모체(母體)인 제일장로교회는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다음해 인 1946년10월19일 조남철 외 13인의 월남(越南)한 교우들이 현재 인성학교 배구장자리에 있던 목조건물에서 창립되었는데 이는 인천에 최초로 장로교가 세웠진 역사적 모임으로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창대 하리라’(욥기 8:7)는 말씀처럼 이 약(弱)하나 거룩한 창립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으니 훗날 나라와 겨레, 더 나아가 세계적인 어머니를 키워내는 여성교육의 장(場)으로서의 효시가 된 셈이다.

     

     제2절 태동의 배경
       
      1. 이기혁 목사의 비젼(vision)


        교회가 창립된 지 칠 개월이 지난 1947년5월16일 49세의 이기혁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부임하기 전부터 그 분이 확신하는 복음 선교의 방향은 세 갈래였다.

         첫째는 교회를 통하여

         둘째는 교육 기관을 통하여

         셋째는 자선 기관을 통한 선교였다. 그러기에 그 분의 가슴엔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꿈(vision)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무하자 즉시 교회 주변을 살펴보았다.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를  세 선교 방향의 선교기지로 삼고 새벽마다 송학동 주변을 기도하며 몇 바퀴씩 순회(巡廻)하였으니 이는 곧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所有)가 되리라’(신명기 11:24)는 말씀을 굳게 믿어서였다.

     

      제3절 무궁화 유치원 설립

        당시 교회 둘레(현 교회와 학교 대지 및 운동장)에는 일본인 헌병대와 그들의 사택 등이 있었고 해방 직후 한독당이 점유하여 지구당사로 잠시 쓰다가  미군이 인천에 주둔함으로 다시 이를 미 헌병대가 병사(兵舍)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사용 중 화재로 폐허가 되자 미군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전에 여기를 사무실로 썼던 한독당도 무관심하니 방치 상태였다.

    이(李)목사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조남철(趙南哲)(당시 인천항만 사무소 소장)과 선우 황(鮮于 煌)(상해임시정부 요인 선우 혁 선생의 딸) 등과 상의하여 이 대지(垈地)를 인수하여 유치원을 세우기로 했다. 이것이 1947년 본 교회 안에 세워진 무궁화 유치원의 출범 배경이다.

     

     1. 무궁화 유치원 이름의 의미
        유치원 이름을 ‘무궁화’로 지었다. 우리 나라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사랑하듯이 ‘믿음 안에서 나라 사랑’을 주장했던 이기혁 목사가 지은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2. 무궁화 유치원 기구 조직

        설립자 이기혁, 이사장 조남철, 원장 선우 황 그리고 3명의 보육교사가 있었다. 처음 개원 때는 기십 명이었지만 차츰 늘어 졸업생 수가 68명으로 늘어났다.  


    3. 무궁화 유치원의 위상
        당시의 일을 회고하던 선우 황 원장의 말을 빌리면 “반사 3명이 수고하는 가운데 즐거웠던 일은 초교파 유치부 연합운동회(1949년)에서 인천 천주교의  64회 유치원생과 영화유치원의 28회 유치원생, 그리고 본 교회 제3회 유치원생들이 겨루는 율동 경기에서 이북으로 쳐들어가는 내용을 표현하여 우리가  1등을 차지했을 때이다.”라고 했다.
        역사도 짧고 교육환경이나 여건이 많이 뒤떨어졌던 형편에서 얻어낸 값진 결과였기에 더 마음이 뭉클했을지도 모른다. 

     

     4. 발전을 위한 유치원 폐원
        어렵게 세워진 무궁화 유치원은 1회 68명, 2회 90명, 3회 90명 4회 102명 (총350명)을 마지막으로 졸업시키고 부득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유치원으로서의 존속이 불가능해졌으나 이는 더 큰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었으니 유치원 이름을 이어받은 무궁화 공민학교가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조남철 부장 송별기념사진에서(1948년 5월9일 당시 무궁화 유치원 교사)

     

     제4절 무궁화 공민학교의 탄생

       바로 이 시기인 1948년부터는 만주 지방과 북한에서 밀려든 난민들로 인천은 온통 피난민 거리가 되었다. 피난민 자녀들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취학 시기를 놓쳐서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일반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이들의 교육문제는 매우 심각하였다.

    이를 본 이기혁 목사를 비롯한 교회 직원들은 저들 자녀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열망(熱望)으로 재정적인 뒷받침이나 비좁은 공간의 활용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미 개원했던 무궁화 유치원 건물 한 켠에 무궁화 공민학교를 개설하는데 뜻을 모았다. 그 때가 1949년 3월이었다. 제일교회 청년회 지육부가 관할하여 시작하였다.

     

      1. 야간 수업으로부터 개강
        저들 새벽 이슬 같은 교회 청년들은 가난하거나 가정이 불우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남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교회에서 시작하자고 의견을 모아 결정하였다. 자진하여 보수도 없이 헌신적으로 야간수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열을 다하여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예배로 하루의 수업을 시작하고 감사 기도로 일과를 마침으로 지적(知的)인 배움과 아울러 신앙에 눈을 뜨게 했다.
     

      2. 마침내 개교한 무궁화 공민학교
        초대 교장 이희영(李希永)장로가 학생 수 50명으로 첫 수업의 장(場)을 열었다. 당시 공민학교 연한은 4년 제 국민학교 과정이었다.   개교한지 한 해 남짓 지나서다. 즉 1950년 봄까지 같은 교육공간에서 유치원과 공민학교가 공존하다보니 여간 벅찬게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교육의 시기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배움을 갈망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넓은 문을 열어주어야겠다는 결단으로 유치원을 폐원하고 공민학교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자(者)가 하나가 되어 향학(向學)에 불탔던 아름다운 시기였다.    그러나 서너 달 후에 6.25 한국전쟁이 터짐으로 학교는 임시 휴교할 수밖에 없었다. 미처 자리잡을 사이도 없이 전쟁으로 중단되고 만 것이다.

     

      3. 전후(戰後) 다시 문을 연 무궁화 공민학교
        그러나 그 해 9.28 수복이 되면서 교우들이 하나 둘씩 돌아왔고 먼저 돌아온 한태준 교감이 휴교 상태의 학교 문을 열었다.

     

      4. 무궁화 공민학교의 발전
        이 후 이희영 교장은 1951년부터 6년제 교육을 실시하여 검정고시(檢定考試)에 합격하면 국민학교 졸업자와 동등한 자격을 갖추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인천시 학무과(學務課)에 교섭하였다.
        이 때 문교부는 1951년 2월26일자로 「전시하(戰時下)교육 특별 조치 요강」을 제정 발표하여 그 동안 중단되었던 수업을 제개하도록 시달하였다.  다시 동년 3월 7일 부산 피난 국회가 「전시중 교육법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으로 된 6・ 3・ 3・ 4 학제로 확정되었다. 
        이희영 교장은 이런 연유에서 여러 중학교를 찾아다니며 본(本) 무궁화 공민학교 출신자 가운데 검정고시에 합격한 자는 정규 국민학교 졸업자와 똑같이 입학시험 응시(應試) 자격을 주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당시 인천시내 공민 학교 수는 10여 개 교에 달했으나 규모의 크기나 내용의 충실면에서 무궁화 공민학교를 따라올 수가 없었다. 이렇듯 무궁화 공민학교의 교육은 계속하여 더 발전적인 단계로 발돋움하여 마침내 인성국민학교를 낳는 징검다리 역할을 단단히 해낸 셈이니 그 공이 어찌 작다하겠는가.
        그리스도가 스승이셨던 것처럼 영혼을 귀(貴)히 여겼던 교사들과 나이를 초월한 제자들과의 각별한 사랑과 노력이 빚어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5. 교직원 변동 사항
        초대 교장 이희영 장로는 재단법인 제일학원(財團法人第一學院) 이사장으로 문교부에 정식인가 청원을 냄으로 1960년 4월 24일 공민학교 교장직을 사임했다. 동년 5월1일 무궁화 공민학교 교감 선우 만국(鮮宇萬國)의 사임원도 수리되어 후임 교장에 선우 황 권사, 교감에 이영수(李英秀)를 임명하였다.
        신임 교장, 교감은 1962년12월31일 자동 폐교될 때까지 봉사한 교회의 빛들이며 소금들이다.
     
      6. 무궁화 공민학교의 연혁
       ⑴ 1949년 3월 무궁화 공민학교 설립
        ① 초대교장-이희영 장로   교감-한태준 집사
        ② 교육연한-4년, 학생수50명
       ⑵ 1950년 6.25사변으로 중단
       ⑶ 1951년 수복과 더불어 개교
        ① 교육연한-6년
        ②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교 진학의 길이 열림
       ⑷ 1962년12월31일 폐교
        ① 인성국민하교 정식 인가로 무궁화 공민학교 발전적 폐교
        ② 교장-선우황 권사
        ③ 교감-이영수 집사
     
      7. 무궁화 공민학교의 특징
        졸업생 이병문(현 인천 제일교회장로)님은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첫째,  선생님들 모두가 제일교회 교회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학교와 교회의 신앙적 연계지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대부분의 학생들이 본 교회에 출석하였다.    
        둘째,  선생님들은 정규학교처럼 교육과정이나 제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퍽 자유스러운 가운데 보다 많은 시간을 인성교육에 치중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셋째,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교의 분위기는 매우 밝았으며 즐거운 학교생활이었다고 동창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넷째.  월반 제도가 있어서 적령기를 넘긴 학생들에게 상급학교로 진학할 발 빠른 기회를 제공하였다.
        다섯째,  선생님들의 열성과 학생들의 노력의 결과로 거의 모든 학생이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8. 무궁화 공민학교의 시대적 역할
        무궁화 공민학교는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분단(分斷)과 전쟁으로 상처받은 청소년들에게 치유와 배움의 안식처가 되어 민족의 수난기에 귀한 역할을 감당했다.
        만일 무궁화 공민학교가 없었다면 그 많은 연령 초과의 미취학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회의 낙오자(落伍者)는 늘어났을 것이고 이들 부모들의 낙심과 사회악(社會惡)은 또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한 사람의 탁월한 선견지명(先見之明)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지도력은 주기도문 2행에 나오는 ‘주의 나라가 임하시며’의 본(本)이 되지 않을까 싶다.
        1962년12월31일 인성국민학교가 정식인가를 얻어 개교하여 1963년부터 신입생을 입학시키자 자동적으로 공민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공민학교 제1회 졸업생이 50명에 불과 했으나 해마다 늘어 폐교할 때까지 10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그 수는 1158명이었다.
        참으로 시대적 사명을 안고 어렵게 문을 열었던 무궁화 공민학교가 10여 년만에 인성국민학교로 승격된 것이다.

     

      9. 양돈부 운영
        재정형편이 어려웠던 1950년대 제일교회와 다비다 모자원, 무궁화 공민학교가 공동으로 양돈장과 재봉부를 운영하여 재원을 보충하였다.

     

          

    -한태준 이희영 장로


      10. 졸업생들의 빛나는 사회활동
        졸업생 가운데 염도의(廉道義) 같은 이는 당시 최우수생들의 관문인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농과대학을 나와 현재 모교인 서울대 농대 교수(농학박사)로 후진 농학도(農學徒)들을 양성하고 있는 것을  필두로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기업주, 공무원 등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들이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 1977년 당시 시내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한 최선옥도 무궁화 공민학교 출신으로 인성의 문을 지나 수도 사범대학을 나와 인성여자 중・고등학교 동창회장을 지낸바 있다.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을 졸업한 이주영도 무궁화공민학교 출신이다.


        

         

        - 무궁화 고등공민학교 제1회 졸업기념 1954.3. 25

     

     

    - 무궁화 고등공민학교 직원일동(1955. 3. 1)

     

       

    - 무궁화 고등공민학교 6회 졸업기념(1959. 3. 14)

      

     

     제5절 무궁화고등공민학교 개교

       1954년 4월에 무궁화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의 문을 열었다. 1967년 3월4일에 제1회 졸업생들에게 빛나는 졸업장을 수여하는 감격적인 행사를 치렀다. 

     


         

     - 무궁화 고등공민학교 중학교 과정 개교기념 (1955. 6. 15)

     

  • 제3장 여성 교육의 장(場) 설립의 취지 1952.05.15

    일찍 한국의 복음화(福音化)는 가정의 복음화 운동에서 시작해야 한다는게 이기혁 목사의 신념이었다. 따라서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 신앙의 어머니를 길 러내야 함이 우선임을 역설 하셨다.

    “나는 기독교 복음 선교가 교회에서도 이루어지고 또 학생들을 통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 큰 의의(意義)가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목회 할 때에도 교회 부속으로 공민학교를 세워서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내가 인천에 와서 인천제일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면서 나는 학교를 통하여 기독교 선교 를 하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중에서도 여학교가 더 선교에 도움이 된 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가정교육이 어머니들에 의존되는 것이고 어머니들이 기독교인일 때 자녀들도 기독교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자 학교를 세워 기독교 교육을 하여야 하겠다고 믿었습니다.”

    그 분은 과감히 남자중학교 보다는 여자중학교 설립에 나섰다.

    1952년 5월15 일 서울 보성(保聖)여자중학교 인천 분교의 명의로 장성식(張晟烒) 장로를 교장으로 임명하여 교회 안에 여자중학교의 문을 연 것이 훗날 여학교의 인가를 얻는 기틀이 되었다.

  • 제4장 재단법인 제일학원 인가와 설립 1954.12.31

    제1절 설립자 이기혁 목사

     

    이기혁 목사는 뛰어난 목회자이면서도 훌륭한 교육자였다. 이(李) 목사가 평생을 바쳐 순종했던 예수님도 당신 나라의 복음(福音)을 선포하실 때 목자(牧者)이시면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복음 전도의 사명(使命)을 주셨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제자(首弟子)인 베드로는 무식(無識)한 어부(漁夫)였다고 말하지만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열두 제자들이 예수께 부름 받을 당시엔 그랬을지 몰라도 3년 동안 주를 따라다니면서 배운 많은 지혜는 높은 학문의 세계를 거친 자만 못하지 않았다.

    다만 성령(聖靈)이 부족해서 예수를 부인하긴 했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저들의 목숨을 건 복음 전파의 운동은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이(李) 목사의 가슴속엔 이런 변화의 물결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 지식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없음을 잘 알았기에 우선 복음 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을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 다비다 모자원 시절의 사진들

     

     

    그러기에 그 분에게 있어 복음화 운동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교육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는 학교가 선교의 방편이기도 해서다. 따라서 복음의 실천의 장(場)인 사회사업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3박자 은총의 터전을 마련하고 싶은 꿈으로 불타있었다. 더욱이 한국전 쟁의 폐허 속에서 교회의 사명인 선교와 교육과 자선은 더 시급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이미 유치원과 공민학교를 세워 배움의 기회를 잃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배울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우선 여자 중학교와 모자원(母子院) 설립을 구상하였다. 마침내 결실이 이루어져 1952년 5월15일에 먼저 여자중학교가 개교하고 두 달 후인 7월27일 제일교회 안에 ‘다비다’ 라는 이름으로 모자원이 개원되었다. 이 모자원은 6・25 동란으로 인한 전쟁 미망인 가운데 자력(自力)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사람과 그 가족을 구호 하기 위한 시설로 출발하였으나 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사회적 사명으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제2절 재단 법인의 탄생

     

    이미 공민학교의 개설과 여자중학교를 개교한 제일교회는 학교 경영을 목적 으로 하는 재단법인을 교회 내에 설립하기로 당회 결의가 있었다.

     

    1. 재단법인 제일학원의 법인 이사 구성

    이사장 : 이기혁

    이 사 : 이희영, 김문영, 김용겸

    감 사 : 오원선, 한태준

    제일교회가 교회사업으로 운영하는 학교설립을 위한 조직이라 법인의 임원 전원이 당회원 중에서 선임되었다.

     

    인가증(1954년 12월 31일)

     

    이로써 제일교회는 훌륭한 여성을 키우는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통하여 교회 의 봉사와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려는 의지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렇게 설립된 재단법인 제일학원은 1954년 12월31일부로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제3절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재단법인 제일학원이 설립되기까지는 이기혁 목사와 당회원들의 헌신적 노력이 컸다.

    이 중에서도 오원선(吳元善)집사(훗날 목사가 되심)의 공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인성여자중학교 설립인가에 필요한 학원재단 기준이 미달일 때에 오원선 집사는 인천시 중구 북성동 소재 동양철공소(東洋鐵工所)의 대지와 건물을 학교 재단에 편입시켜 재단법인 제일학원의 인가를 얻게 하였다.

    후일 오원선 집사의 재산을 반환하기 위하여 김문영(金汶榮)장로는 인천시 동구 송현동 소재 목양표(牧羊標)메리야스 공장을 수익 재산으로 제공해 주었다. 사실상 김문영 장로는 수익 재산을 제공한 후 공장 운영에 많은 지장을 겪었다. 훗날 학교 재단이 안정됨에 따라 김문영 장로의 재산도 모두 반환하였다.

    그 뿐 아니라 송도 유원지 요지에 한태준(韓泰俊) 장로 소유의 점포가 있었다. 친척 되는 분이 관리하고 있었으나 자금 관계로 관리가 어렵게 되었다. 수 차에 걸친 담론(談論) 끝에 한태준 장로는 시가(時價) 이하의 싼값으로 제일 학원에 매각해 주었다. 이 대지와 건물 삼백 여 평은 그 후 제일학원의 유일한 수익원이 되었다.

    이렇듯 교회사업을 위하여 선뜻 당신 재산을 제공할 수 있었던 주의 종들의 아름다운 믿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도 훌륭한 본보기가 되겠다.

    당시를 회상하는 김문영 장로의 말을 빌려본다. “나는 이기혁 목사의 검소 (儉素) 청렴(淸廉)한 신앙 지도 생활과 교회의 교육 기관, 모자원(母子院) 기타 전도사업에 필요한 원대한 꿈과 고차원적(高次元的)인 애국심에 감동되어 이(李)목사가 제창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따라 갔고 또 교회와 교육기관 기타 모든 선교 사업 하나 하나가 이 목사의 구상과 제안에 의한 것이며 다른 이들이 내놓은 안(案)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내 60평생에 몇 분 목사를 모셔 보았고 여러 목사들을 알고 있지만 이기혁 목사와 같은 주의 종은 대한 적이 없습 니다. 1962년에 인천에서 서울로 옮겨 온 이래 이 목사를 위한 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했습니다.”

    교인 모두의 염원하는 바가 컸고 그 끊임없이 부르짖는 기도에 주께서 응답 하신 놀라운 은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4절 재단 설립과정에서 특기(特記)할 만한 일화

     

    김문영 장로의 목양표 메리야스 공장은 학원인가를 받기 위한 방편으로 재단에 편입한 것이고 영구히 거치할 수 있었던 게 아니어서(물론 김장로 자신은 반환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영구적인 학원 재단을 확보하기 위해 이희영장로로 하여금 대한 제분으로부터 7백만환(당시 화폐 단위가 ‘환’이었음)을 기체케하여 학원재단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사채의 반환이 어려워지자 교우들의 힘겨운 연보로 2백 만환은 변제되었다.

    전액 처리는 대한제분회사의 독촉이 너무 심하여 경북 봉화군 소재 수백 정보 야산(재단 조성을 위해 준비했던 것)을 부득이 방매하여 청산하였다. 그 당시 사채 이자만도 거액에 달했다. 그럴수록 벙어리 냉가슴 앓듯 이희영 장로의 심적(心的) 부담이 컸다.

    당회는 이 처리 문제로 진지한 의논 끝에 현 김용호(金容鎬) 집사를 시켜 건물 대지 및 공민학교 운동장을 이희영 장로가 부담한 채무와 상쇄(相殺)하기로 하고 담당 책임자는 선우 황 집사로 선정하였다.

    곧바로 선우 황 집사는 임효순과 함께 이희영 장로를 찾아갔다. 이때 이희영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이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내가 공민학교 교장으로서 내 학생들이 즐겁게 뛰어 노는 운동장을 팔 수 없고 장차 하나님의 전(殿)을 지을 땅을 처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했으니 얼마나 큰 믿음인가.

  • 제5장 인성(仁聖)의 이름으로 여는 여성교육의 시작 1955.03.29

    제1절 인성여자중학교 인가

     

    재단법인 제일학원으로 인가를 받은 지 석 달 후인 1955년 3월29일 문교부 로부터 학교 명의를 인성여자중학교로 개칭하는 인가를 받았다.

    학급 수는 1,2,3학년 각기 두 학급씩 모두 6학급의 설립인가를 받은 것이다.

    인천시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바로 아래 망망대해(茫茫大海)의 황해를 바라 보는 자리에 오래 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누가 알았으랴.

     

    제2절 인성학교 명칭의 뜻

     

    당시 학교인가를 받기 위하여 서류 뭉치를 들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뛰어 다녔던 전(前) 서무과장 정용욱 장로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우리는 문교부에 학교명을 인천제일여자중학교라고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문교부에서 제일여자중학교의 제일이라는 명칭이 일본식의 제일, 제이, 제삼과 같은 생각을 줄 우려가 있다고 개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이기혁 목사님과 그 외 여러분과 의논하여 인천의 ‘인’(仁)자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거룩할 ‘성’(聖)자를 따서 인성(仁聖)여자 중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제3절 중학교 초대 교장 김용겸(金用謙) 장로 취임

     

    초대 교장 김용겸 장로는 목조건물(木造建物) 2층 교실 4개와 학생 27명으로 출발하였다. (당시는 4월초가 학년도 시작이었음)

    같은 해에 3월, 전에 다니던 졸업반 학생들이 비로소 인성여자중학교의 명의로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

    1. 인가 축하 및 김용겸 교장 취임 예배

    재단법인 제일학원 인가와 인성여자중학교 인가를 전 교인이 얼마나 기뻐하며 축하했는가는 1955년 5월 22일에 거행한 ‘인가 축하 및 김용겸 교장 취임 예배’ 순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1955년 5월15일 제75회 당회록)

    1956년 3월8일에 제89회 제일장로교회 당회는 교육재단 이사에 당연직 이 사 이기혁, 이희영, 김문영, 김용겸 외에 김선주, 한태준, 김차익, 선우황, 정대준 등 5명을 선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사진은 완전 보충하게 되었다.

     

     제4절 체제 정비와 교육의 내실

      1. 개정된 교육과정과 시간배당에 따른 학교 운영:   1954년 공포된 중학교 교육과정 시간배당 기준에 따른 교육과정 운영이 착실히 실시되었다.
      2. 교가제정:    이는 한국 전쟁이 끝난 1954년 봄에 박광원 작사, 이동훈 교수 작곡으로 1, 2, 3절과 후렴으로 제정되었다.

     

     

    1절. 줄기찬 태백산 등에 두르고 양양한 황해를 바라보는 곳
           반석 위에 우뚝 솟은 우리 인성은 지식과 사랑의 전당이로다.
    2절. 산과 해 바다의 본을 받아서 슬기론 사랑의 본이 되어라
          스승님의 가르치신 큰 뜻을 쫓아 반만년역사를 알고 나가라.
    3절. 비바람 눈서리 굽히지 않고 굿굿이 뻗어가는 우리의 넋은
          오대양 육대주에 널리 퍼져서 하늘에 사무친다 인성의 이상
        (후렴)
        우리들은 빼어난 배달의 딸 높은 이상 굳은 의지 솔대를 삼아
        배우고 가르쳐서 열매 열음이 진리에 터 닦은 인성의 배움

     

    3. 교가제정에 대한 일화
     

       (1) 교가 작사에 얽힌 이야기

     

         작사자인 박광원씨의 말이다.
         “필자는 1952년 가을에 대한민국 학도병에 출정하였다가 인천 영락원(당시 동진보육원)에서 사회사업에 전념하던 중에 보성여자중학교 분교장 장성식 목사의 부름을 받아 보성여자중학교 인천분교에 오게 되었다.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남게 될 부끄러운 한국전쟁, 이 전란의 한복판인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인 항구도시 인천은 당시 이 나라 이 민족과 세계 21개 국가의 6.25 참전국이 함께  얼크러져 빚어낸 한국전쟁, 그 실태 그 참상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전쟁과 교육의 시작. 신앙과 전쟁과 교육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큰 시련이었다.

    인성학교의 시작은 바로 이때 보성여자중학교 인천 분교로 시작하였다. 이 시작은 신앙이요 꿈이요 용기였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사람, 민족에 대한 꿈을 가진 자(者)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다.
         인천제일교회 목사 이기혁. 그는 시작했고 그와 뜻을 함께 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 뜻을 부분적으로 이루어냈다. 전쟁이 빚어낸 피난민과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전쟁고아와 미망인.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음을 넘나들던 시대였다. 지금은 별로 먹기를 꺼려하는 꿀꿀이죽은 그 어려운 때 허기를 면하게 하든 보양식이었다. 그토록 참담한 사회 속에서도 그래도 배워야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꿈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실현되고 있었으니 바로 보성학교 인천 분교 시절이다.   

       이 회상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하나가 되었던 시기로 지금은 까마득한 남의 이야기로 기억될 뿐이다.
         나는 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는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일제 때는 일본 신사에 가서도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예수, 하나님 교회는 그 실천의 성과를 불문하고 그 영역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평생토록 깊은 감회와 영향을 준 세분의 목사가 있다. 유년시절의 평양신학교 출신의 유기섭 목사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서울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이고  20대 청년시절 인천제일교회 이기혁 목사이다.
         서울 남대문 교회 김치선 목사는 민족에 대한 정열을 심어 주었고 인천제일교회 이기혁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이상(理想)을 심어 주었다.
         내가 인천에서 산 것이 50년 되었는데 인성학교에 온 이래 다른 교회엔 출석해 본적이 없다. 내가 인성학교 교가를 작사하게 되었던 것을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의 하나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인성학교 교가(校歌)가 제정된 1954년은 내 나이 23세로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기회를 주셨다. 그 해 봄, 인성학교의 새로운 시작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보성학교 인천분교에서 벗어나 어엿한 인성(仁聖)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첫 번째가 학교의 교육혼(敎育魂)이 담긴 교가를 짓는 일이었다.
         인성학교 김용겸 초대 교장은 독실한 신앙인이요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그는 일제 때 만주에서 대학을 나오고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관재청, 부흥부, 국토건설본부, 건설부 등 공직(公職)에 있었다. 특히 경기도 관제국 판매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인천제일교회와 인성학교에 불후의 공을 남겼다. 인천제일교회와 인성학교가 귀속재산을 특별히 많이 불하받게 된 것은 그의 공이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김용겸 교장은 이기혁 재단법인 제일학원 이사장과 협의한 후 인성학교 교가를 공모했다.
         재단이사, 학교선생, 모든 뜻 있는 사람은 인성학교 교가를 작사해서 제출 할 수 있도록 했다. 충분한 시간을 주어서 알렸다. 그 결과 두 편의 교가 초안이 제출되었다. 하나는 김용겸 교장이 써서 제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자가 낸 것이다. 두 편의 교가 초안은 작사자를 명시하지 않고 나란히 프린트되어 재단이사와 학교선생 기타 인성학교 모든 관계자들의 선택에 맡겼다. 그렇게 해서 인성학교 교가는 제정되었다.
         그는 지금 미국 애틀란태에서 부인 이신애 선생과 함께 노후를 보내면서 82세 노인답지 않게 ‘대륙의 꿈을 찾아서’라는 만주 유랑기를 펴내고 이어서 한국 유랑기를 계속 집필할 뿐 아니라 미주지역 교포들의 선도를 위하는 모든 일에 적극 나서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한 김용겸 인성학교 초대 교장에게 나는 경의(敬意)와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교가(校歌) 가사 속에 숨쉬고 있는 이 민족의 기독교적 여성교육의 목표와 이상(理想)은 학생과 스승, 설립자와 교회, 그리고 모든 인성인과 겨레의 소원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참고로 인성학교 교가를 소개하고 인성의 이상과 소망이 끊임없이 이루어져 모든 인성인과 교회, 나라와 민족에 큰 빛과 사랑이 되어 영원토록 비추이기를 바란다.”


       (2) 작곡자 이야기

         인성학교 교가를 작곡한 이동훈 교수는 당시 숙명여자 대학교 교수로서 우리나라 음악계에 촉망받던 분으로 한국찬송가공회가 펴낸 찬송가 가운데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와 303장 ‘가슴마다 파도친다’  그리고 461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를 김재준, 반병섭, 김활란 작사를 작곡하여 한국교인들의 영원한 찬송으로 남겨진 분이다.
         그는 인천제일교회 설립자이며 재단법인 제일학원이사장을 역임한 이기혁 목사님의 장남으로 애석하게도 1974년 교통사고로 소천(召天)하였으나 그가 남긴  교가와 1967년 찬송가의 몇 곡은 아름다운 선율로 세계 방방곡곡에 울려 퍼질 것이다.

     

     

  • 제6장 교사 신축 과정에서의 어려웠던 일 1955.04

    1955년 3월29일 인성여자 중학교의 설립인가가 나오자 이희영 장로를 건축위 원장으로 선출하고 교사 신축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기혁 목사는 이상규(선우 황의 부군)를 대동하고 미군사원호처(美軍事援護 處)에 여러 차례 교섭을 하였다. 그 성과로 연와조 2층 8개 교실(건평 225평) 의 건축자재를 원조 받게 되었다.

    이것이 착공 계기가 되어 1958년 2월에 신축 교사 낙성식을 가졌으나 청부금 노임 등의 재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된 공사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원조자재 일부를 환금(換金)하여 노임에 충당하기로 하고 경비 등의 절감을 위해 학교에서 직영하되 서무 담당자로 하여금 실무를 전담케 하였다. 미군사 원호처로부터 원조 받은 건축자재 처리과정에서 자영(自營) 경험의 미숙(未熟) 으로 자재 및 건축자금 조달에 있어서 부족을 초래케 되어 이에 책임을 느낀 김용겸 교장은 서무 담당자와 함께 사임하여 공사는 일시 중단 사태에 빠졌다.

    기초 공사 과정에 있어서도 일부 매립 대지 부분의 기초 공사가 부실하게 되어 전문기사(專門技士)의 감정으로 기초 공사를 다시 하게 되니 재정난은 더욱 심하여졌다. 공사는 중단되고 교장도 사임하여 공석(空席) 중이라 어려운 일이 겹친 것이다.

    이기혁 목사는 급히 대구로 가셨다. 대구 성광 중학교에 근무 중이던 백운기, 이동욱, 박원호, 김덕용, 조겸석 등을 초빙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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