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짜 | 내 용 | 날 짜 | 내 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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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03.07 | 입학식 | 09.07 |
전국체육대회 경기도 예선(농구부) 준우승 |
04.13 | 부활절 예배(강사 이기혁 목사) | 09.17 | 교내 영어성경 암송대회 |
04.24 | 무용콩클(인천신문 주최) | 10.10 | 세종문화 큰잔치[음악의 밤] 합창부 출연 |
05..08 |
어머니 날 기념 예배. 장기놀이 대회 모범어머니 표창. 기념품 증정 |
10.17~19 | 졸업반 수학여행 (속리산 법주사) |
05.23 |
제1회 경기도 예술제 참가 합창 1등, 피아노 독주 1등, 독창 2등 |
10.29 | 학교심사(경기도) |
5.30~6.1 | 본교 신앙부흥회(강사 김창인 목사) | 11.09 |
추수감사예배(강사 최지웅 목사) 1.설교대회 2.반대항 합창경연 3.배구대회 |
06.08 |
5.16 기념 농구대회(시내) 고등부 우승 |
11.20~12.05 |
장명자(고3) 개인시화전 시립박물관. 인천문화원에서 |
06.15 | 제1회 경기도 백일장 대회(인천신문) | 12.01 | 구월2동 성말 본교[개척교회] 첫 예배 |
07.06 | 교내 심포지움 개최[제목 내필생활] | 12.10 | 본교 [사생과] 연구발표회(경기도) |
07.11 | 고등학교 합창부 KBS–TV에 출연 | 12.23 | 크리스마스 축하예배 |
8.5~8.10 |
하기 농촌 봉사활동 인원: 학생 25명, 교사 5명 장소:시흥군 군자면 도일리. 고잔동 |
1964.02.01 | 제1회 졸업식 |
1963년 6월에 사립학교법이 제정, 공포됨으로써 종래의 재단법인이 학교법 인으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본 제일학원에서도 1963년 6월 5일 학교법인 제일학원을 발족시켰다.
이사장: 이의영 (제일교회 장로)
이 사: 김문영, 권세열
감 사: 염태운, 한태준
고2 함 정 순
내일이면 떠난다는 기쁨과 함께 4일 저녁에는 학교에서 자기로 했다. 희망과 초조함을 안고 눈을 부치려하였으나 재잘거리는 통에 새우잠을 자고 보니 새벽 세시 우리 일행은 4시 30분 차를 타기 위해 분주히 서둘렀다.
교장선생님 아래 간단한 예배를 마치고 구루마에 짐을 실었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몇 시간은 있어야 할 것 같다. 큰 도로를 따라 새벽길을 걷는 그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쭉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우리의 길을 안내하였다. 인간의 대열처럼..
언제 오셨는지 여러 선생님이 자전거로 또는 걸어 나오시기도 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이따금 군용 트럭과 낚시질 가는 할아버지의 모습 수인역에 도착하여 차에 짐을 실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뽀얀 안개가 낀 것만은 확실하다. 차는 곧 출발하는가보다.
소녀의 애절한 비가의 소리를 지르며 차는 어둠을 뚫고 멀리 달린다.
차안은 조용하다. 말하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다. 창 밖을 내다본다. 아직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어느 땐가 이슬비가 차창을 부딪는다. 그 안개가 이슬방울이 됐는가보다.
날이 훤히 밝으며 아침 햇살이 창가에 머문다. 우리「도일」일행은 원곡역에서 내렸다. 고잔 손님의 인사와 함께 다시 발차하였다.
어느새 나오셨는지 구루마를 가지고 마중 나온 도일교회 반사님들이었다.
프랫트홈을 나와 가로수 늘어선 길을 따라 조그만 언덕을 따라 도일교회에 왔다.
「대한 장로교 도일교회」라는 이 교회는 첫 눈에 「상록수」에 나오는 예배당 같다고 생각이 되었다.
마루 끝에 앉아 시계를 보니 아홉시, 퍽 시간이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우리가 오늘부터 이 교회 안에서 어린 학생들과 짧은 기일이나마 같이 지낼 것을 생각하니 기쁨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이곳을 떠나기 전 어린 생명들에게 힘이 될만한 일을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책임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조용히 잠든 교회 안에도 아침 햇살이 온 교회 안을 비추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니 아까까지도 없던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종각의 종소리가 8월의 고요한 온 마을에 퍼지며 점점 학생 수는 많아져갔다.
노래 공부로 시작하여 동화 설교 등. 마루 바닥에 앉아 구슬 같은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단 위에서 이야기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는 것을 볼 때 마음 한 구석에서는 흐뭇한 마음 감출 길이 없었다. 각 반으로 나누어 분과공부가 끝나면 아침예배는 끝나는 것이다.
교과 반생회 때 집사님과 반사님을 모시고 먼저 인사소개부터 하였다. 여러 가지 이 교회에 대해서 집사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날도 새벽 4시에 깨어 새벽기도를 마치고 어제와 같은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점점 아이들과 친숙해 진다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노래공부 시간에는 모두들 좋아 하였다. 참새 입을 벌리며 한절한절 따라 부르고 또 일어나서 해보라고 하면 음정도 안 맞는 노래를 정말 핏대를 울려가며 악을 지르는 것이다.
노래도 그런대로 귀여웠다. 낮 한시부터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모두들 고단한 모양인지 서늘한 곳을 찾아 낮잠을 잤다. 교회 밖에는 그야말로 한산한 시골 풍경이었다. 종각 옆으로 몇 그루의 무궁화 꽃이 이 교회를 지키고 있고 「인성」의 천막아래 멍석 두 개가 깔려있었다.
폭염이 내리쬐는 정오다. 팔벼개를 하고 누우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푸른 논과 끝없이 파란하늘, 자연그대로의 경치였다. 가끔 기와로 덮인 원두막도 눈에 보인다. 이곳에서 한 5분을 가야만 우물이 있는 곳이다. 작년 이맘때 이곳을 수리하였다는데 지금은 많이 못쓰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 우물의 물이 얼음물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약수터의 물보다도 푸른 하늘보다도 더 시원한 물을 마시면 창자까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덧 4일째 되는 날이다.
날이 갈수록 학생 수는 많아졌다. 대부분이 유년부 학생이었다. 이날로 분과 공부가 끝나면 모두들 동그랗게 둘러앉아 왕자공주의 재미있는 놀이로 들어간다.
시장에서 사온 펑 튀기를 사다가 열다섯 개씩 실에 꿰어 나누어주니 저마다 좋아서 떠들썩하였다.
이날 저녁 예배는 마지막이므로 선생님께서 예배 순서를 맡으셨다. 예배당이 어른들과 동네 처녀로 꽉 차서 예배당이 넘칠 것 같은데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다.
발표회에 들어가 성경 암송대회 무용 음악 등에 걸친 시상이 있었다. 아무 상도 못 탄 사람에게는 연필 한 자루씩 나누어주었다. 초롱불을 들고 밖에까지 나와 애들을 돌려 보내주었다. 몇몇 애들은 「선생님 내일 떠나시죠?」하며 울먹이며 물어보는 아이도 있었다.
마지막 반성회와 동시에 여러 집사님을 모시고 게임으로 들어갔다. 먼저 엄 선생님의 재주를 보기로 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때 여성들의 폼을 잰대나 제법 허리에 손을 얹고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모습이란 허리를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정말 이곳을 떠나는 날이다. 이별이라 생각하니 너무나 짧은 기일이었다. 모든 것 어느 것 하나 정들지 아니한 것 없다. 그곳의 흙에게도 고향을 떠나기라도 하듯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정든 교회를 멀리 두고 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섭섭한 것은 아이들이 안 나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들 지금쯤 잠이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말은 「석희」만은 우리와 함께 역까지 나갔다. 손을 잡고 걸어가며 잠시나마 정들었던 석희를 떼어놓고 가기가 퍽 애석했다.
석희의 손을 다시 한번 꼬옥 쥐어주었다. 「석희야 잘 있어.」「네. 선생님 모두 안녕!」6시 차를 기다리는 손님이 많았다. 아직까지도 서있는 석희. 「선생님 떠다는 것을 보고 갈래요」귀여운 목소리로 말하며 우리 쪽만 향하고 쓸쓸히 서 있었다.
이윽고 차가 왔다. 오랫동안 못 만난 「고잔동」의 얘기로 꽃피우며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희야 잘 있어」소녀의 조그만 몸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밝아오는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석희의 모습을 멀리 떼어 놓으며 기차는 기운차게 인천을 향해 달린다.
고2 최 재 희
우리 학교에 많은 자랑이 있지만 그 중에서 매년 행하여지는 농촌계몽은 첫 가락을 꼽을만한 전통적인 자랑이요, 기쁨이다. 1963년 여름방학 때도 역시 두 팀이 각각 도일면과 고잔동으로 농촌 계몽과 봉사의 임무를 가지고 나갔었다.
다음 글은 지난번 고잔동을 다녀와서 느낌을 내 주관대로 적은 것이다.
요즘 우리들은 애국이니 재건이니 혁명 과업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듣고 쓰고 있다. 우리학교에도 기도 할 때마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빼지 않는 학생이 많다.
여기서 「농촌 계몽이나 봉사」를 생각할 때 어느 곳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 즉 애국하는 길이요 재건이 될 수 있으며 곧 혁명 과업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되며 동시「미션․스쿨과 농촌 계몽 아니면 봉사」를 심각히 생각하게 된다. 크지도 않은 우리나라 땅에 딴 나라인양 아무것도 모르고 미개한 생활 속에서 굶주리는 참으로 딱한 곳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니 말이다.
보통 계몽이라 하면 문화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는 흔히 말하는 깡촌의 생활 방식을 개량하여 보다 나은 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념이나 우리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랑의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을 그들에게 알려주어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도 틀린다는 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저 기도와 그들을 위한 간절한 맘만 간직하고서 기독교적인 교훈을 주면 될 것이다. 이것이 곧 학교에서 뜻한 바이고 그러나 그들을 위한 적극적인 표현도 중요하다. 즉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구제와 노동으로도 도울 수 있는 일과 최대한의 친밀감을 주는 것 말이다.
그럼 지난 번 고잔에 나갔던 것을 얘기하겠다. 고잔동 중에서도 우리가 간 약 130호의 진흥촌은 부채꼴 같이 확 트인 갯벌 한 모퉁이에 자리잡은 것은 불과 5,6년 전 저 전라도에서 이곳 갯벌을 개간하면 잘 살 수 있겠다는 목적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안되어 여태 야무진 갯흙만이 미끄덩거리고 논이라곤 시험적으로 하는 극히 적은 부분인데 안 되었다. 밭 역시 왕모래가 많은 황토가 동네 변두리에 조금 있으나 그런 흙에서 잘될 리가 없다. 이곳에선 마구 나는 풀도 아껴야 한다. 때기도 하고 거름도 하기 위해서다. 자연적인 우물까지도 물이 너무 흐려서 그냥 마시기엔 싫은 정도다.
그러나 우물 담을 한 건 하나밖에 없고 모두 돌로 쌓고 그냥 땅과 같은 높이라 애들이 빠질까 봐도 무섭고 위생적으로도 너무 불안하다. 집들은 모두 같은 흙담의 움집 같은 집이요, 별로 더 나 보이는 집이 없다.
모두가 이렇고 보니 품팔이요 돈을 벌려면 저 먼 이웃 동네로 가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온 식구가 바다에 나가 맛살을 잡아다 먼 곳까지 이고 나가 팔아야 겨우 말분을 사다 먹을 수 있는 이곳 어린이들은 쌀밥 먹는 건 꿈이요, 기껏해야 옥수수 가루라니 참 불쌍하다. 모두 영양실조라서 살빛들이 누렇고 어떤 집 아기는 팔다리가 꼬여지고 자라질 못한 채 머리만 커졌고 한 집의 할머니는 과년에 못 잡수시어 몸을 못 쓰시는 것이다.
이 동네 좋은 건 하나도 없다.
이런 곳에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어 초라한 교회나마 세우고 예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교회를 중심으로 간 것이다.
이런 딱한 곳에 외부에서 그들을 위해 온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일에 모두 관심을 갖고 적은 일에도 퍽 고마워하는 것이다. 가던 날부터 하기 성경학교를 시작했는데 교회가 너무 적어 근 2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천막을 치었다. 낮 아홉시부터 열두시까지와 저녁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가 어린이 시간인데 평균 150명씩 오고 어른들도 많이들 참석하여 자녀들의 공부하는 걸 재미있게 보시곤 의례 갈 때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신다. 그럴 땐 오래 계속을 못해드림이 미안스러웠다.
꼬마들은 매일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며 신통한 시간 못 지내다 저희들 세상 만났다고 좋아하며 종일 교회에서 떠나질 않는다. 저저끔 다투어 와서 손이라도 잡으면 뭐 그리 좋은지 야단이다. 그럴 때면 땀내가 코를 찌르지만 싫다고 피할 맘은 조금도 없었다. 더구나 우리 유치부 꼬마들의 엉터리 노래와 손 무용은 맞고 안 맞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대로 재미있고 귀엽기만 하다.
쉬는 시간에 펑튀기 과자를 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하루는 전체 레크레이션 시간에 모두 두 다리를 쭉 뻗고 놀 때 미리 실에 꿰어 준비했던 펑 튀기 과자를 한 줄씩 머리에도 얹어주고 손목에도 걸어주니까 퍽들 좋아한다. <또릿또릿한 눈동자, 순진한 애들, 저 도시에서 호사스럽게 공부하는 깜찍한 애들, 똑같은 가르침을 준다면 분명코 이 애들이 더 착실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재미있게 웃으며 공부하는 중에 무엇하나 이들 맘속에 영 안 잊어버릴 교훈 하나씩만 가슴 깊이 새겨 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우리들의 시간도 재미있게 잘 되었지만 어른들을 상대한 김창락 선생님과 이만열 선생님의 「흉악한 죄악과 멸망 중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육신의 일용한 양식과 영원의 빛과 소망을 바라보며 참된 삶을 살 수가 있다」란 요지의 말씀은 그대로 듣는 사람의 맘속에 사무치어 깊은 감화에 잠겨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이것으로서 그쳤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 진정 일을 했다고 못할 것이요 설교 말씀으로서 그들에게 말하였다는 것이 오히려 위선이 되고 그들에게 역효과가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입던 옷이나 깨끗이 빨아 정성으로 또, 부족한 용돈을 절약하여 내는 돈을 걷었던 것이다. 그때 모아진 것이 옷이 416점이요, 돈이 우리들과 제일교회 교인들에게서 수금한 것이 7,397원 이었다. 그래서 그 옷은 200여명 되는 그 동네 아이들에게 맞는 걸로 골라 차례차례 입혀 주었을 때 천진난만한 꼬마들 그 옷을 입고 마치 새 명절복이나 입은 듯한지 퍽 좋아한다. 그러고도 어른 옷이 근 200여 점 남아 각 집으로 방문했을 때 그 부모님들의 치사가 민망스럽고 더 미안할 지경이었다.
또, 그 돈으론 시멘트 21포대를 사서 그 동네 제일 급하고 오래 그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우물 6개를 수리했고 소독도 해 주었을 때 그곳 사람들의 고마워함은 참으로 컸다.
그 때 우리가 낸 불과 몇원, 또 입던 옷 하나, 보잘 것 없는 것이나 그것이 모여진 것에 정성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손에 넘어 갈 때 그것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졌었다. 즉 맘과 맘 사이에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직접 농촌에 들어가는 것만이 일이 아니요 이렇게 협조함이 개인마다의 곧 계몽과 봉사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구제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우린 잘 안다.
우리 학우들! 해마다 있는 우리 학교의 이 계몽 사업에 우린 좀더 정성된 맘으로 적극 참여하여 보다 더 많은 불쌍한 사람과 농촌을 위해 일하자.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애국하는 것이요, 맞는 우리로서의 할 일 중에 중요한 일일 것이다.
특기 할 만한 일은 인성학교에서 멀지 않은 청관(淸舘)에 있는 ‘인천화교중산학교’(仁川華僑中山學校) 학생들과 본교 고등부 농구부와 친선(親善) 게임을 가졌다. 6월8일 있었던 이 게임에서 본교가 우승을 했으나 그 보다 서로 다른 민족간의 친화(親和)를 위한 모임이란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前) 해인 1963년 12월에 발간 된 ‘인성’ 교지 3집에 그 학교 교장님의 특별기고를 부탁한 데서 비롯된다. 인천화교중산학교의 장금종(蔣金鐘) 교장님은 쾌히 승낙하고 속히 옥고(玉 稿)를 보내주셨다.
(다음은 그 원본과 번역본의 첨부임)
신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1963년 12월6일 중 고교 모두 3학급씩 증설인가 되어 중학교 15학급, 고등학교 12학급 합하여 27학급으로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