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 1969학년도 학교일정 .

    1969학년도 학교 일정                                  

    날 짜 내 용 날 짜 내 용
    1969.03.04 입학식 06.13 콜레라 예방접종
    03.12 신입생 환영예배 06.15 교내 봄 백일장
    04.04 기독학생회장 및 부회장 선출 06.25 자유공원 조기청소
    04.07 부활예배 07.24 종업식
    04.12 중간고사 08.10 하기봉사대 출발
    04.13 교내 부흥회 10.08 교내 가을 백일장
    04.26 전교생 회충약 복용 10.18 회충약 복용
    05.02 체능검사 10.20 기독학생회 임원 개선
    05.08 어머니날 기념식 11.06 시와 음악의 밤
    05.15 개교 17주년 기념식 스승날 기념식 11.12 환경미화심사
    05.20 고3 설악산 수학여행 11.13 추수감사절 행사
    05.23 봄 소풍 11.18 대입 예비고사
    05.24 장티푸스 예방접종 11.19 X마스 음악예배
    05.29 X-레이 촬영 12.20 종업식
    06.04 위문품수집 1970.01.15 제7회 졸업식
  • 1969년도 조회 광경 1969.03
  • 숙명여자대학교주최 장려상 1969.04.23

    숙명여자대학교 개교기념 행사「청파제」의 하나인 제3회 「전국여고생백일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350여명의 재원들이 모여 글 재주를 겨룬바 산문부에서 고3의 유병재 전옥숙 양이 「장려상」에 입상하여 <인성>의 글 솜씨를 자랑했으며 상품으로 받아온 숙대 미술대학생들이 손수 조각한 나무로 된 벽걸이 두 개는 학교에 기증하였다.

    전옥숙 양은 수도여자 사범대학 개교 기념으로 1969년 10월 23일에 동(同) 대학교 교정에서 열린 전국남녀중・고등학교 글짓기 대회에서도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 스승의 날 행사 1969.05.15
  • 수학여행- 고3 설악산 1969.05.20
  • 전국남녀 백일장에서 수필 3등 1969.05.23

    사월 초파일 기념 겸 동국대학교 개교 63주년기념 제10회 「동국축전」의 한 행사로 열린 「전국남녀고교생 작품 현상모집」에 본교에서 시 3편과 수필 1편을 응모했는데 전국에서 보내온 총 300여 편중에서 65 명의 입선자 속에 홍순희(고2) 전옥숙(고3)양이 영예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다음에 입선된 사람들만이 동국대학교 교정에 다시 모인 백일장에 참가한 전옥숙이 수필부문에서 세번째 자리에 올랐다.

    동 백일장의 제목은 「시- 강. 새벽의 노래」, 「수필- 절. 신록」이었으며 입상자 대부분이 남학생이어서 여학생으로서 보기드문 좋은 실력이라는 칭찬도 받았다.

  • 폐품모아 유가족 돕기 1969.06.05

    1969년 현충일(6월 6일)을 앞두고 학생회에서는 폐품을 모아서 위문품을 만들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몸 바친 많은 군경(軍警)의 뜻에 감사할 양으로 군경 유자녀 돕기운동을 벌렸다. 구체적인 방안은

    1. 본교생 중의 군경유자녀를 6월 5일 12시 30분에 교장실에 모아 놓고 간단 한 위로의 시간을 가지고

    2. 양로원 방문 위안

    3. 소년교도소방문,

    4. 일선장병 위문

    5. 불우청소년 교육지원 등이다.

    폐품 종목은 ▲국, 중학교 교과서, ▲잡지, ▲신문, ▲병, ▲기타들인데 지난 해에도 이 운동은 학생들의 많은 협조로 좋은 결과를 가졌다.

  • 기독학생회 활동 1969.08

    1969년 기독학생회는 K-SCM (Korean Student Movement-한국 기독학 생 운동회) 여름대회도 참석하였다.

    이 모임은 1948년 4월 25일에 창립하여 예수교 장로회, 기독교장로회, 감리교 ,구세군, 성공회가 연합이 되어 한국 기독 학생회가 구성되었다고 한다.

    목적은 자아확립과 복음전달, 그리고 교회 갱신, 사회참여와 국제 관심으로 학원과 교회, 전국과 세계로의 복음 전파의 길이 열린 자리로 본교 기독학생들의 활동도 좁은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의 활로를 향해 매진함이었다.

  • 복음의 씨를 뿌리고 와서 1969.08.05

    고2 이 환 옥

    마음의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예수는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이 땅의 소금과 빛의 구실을 다하셨다. 세상에는 있으나 마나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꼭 있어야 될 사람이 있다.

    이 사회에 명랑과 축복을 던지고 희망과 보람을 주어서 기둥과 대들보의 구실을 다 하며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일원으로 좀먹는 사회를 하루 빨리 주변에서 사라지게 해서 우리의 앞길에 밝은 서광을 바쳐야겠다는 사명을 우리는 받았다. 오로지 구원이신 주님의 사업에, 한 부분만이라도 봉사할 수 있는 종들은 이 직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의지해온 것이 우리 인성의 한 목표였다.

    봉사할 수 있는 기간은 학생들이므로 방학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암흑세계가 낳고 있는 비극을 찾아서 봉사대원들은 광명의 빛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것을 결단했다.

    흔히 무더운 여름을 시원한 바닷가에서 씻어 보자는 마음이 먼저 앞서지만 인성의 등불이 극기적인 노력으로 충성할 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탬이 되어 가난한 심령을 건져내어 광명만이 존재하고 반드시 있고야 말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날 것을 작은 마음속에서도 염원하며 8월 4일 봉사대 결단식을 마치고 목적지인 충남 당진군을 향하여 배를 타고 떠났다.

    일곱 시간의 긴 여행, 소나기는 거든 퍼붓고 배는 심하게 요동했으나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 그곳 교회의 장로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나와 있었다. 뱃터에서 50분간 도보로 걸어가는 동안 질서있게 정돈되어 있는 마음의 풍경과 확 풍겨오는 흙의 냄새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자식」임을 새삼 느끼게 했다.

     

    <봉사 대원>

    지도교사 : 박희순 선생님 윤희미자 선생님

    안 내 자 : 이건용 선생님

    학생대원 : 고 3 : 강순자 강복희

    고 2 : 이환옥 유인숙 이윤옥 오창희 이미자

    고 1 : 지미숙

    봉사기간 : 1969년 8월 5일~8월 10일

    대 상 지 : 충남 당진군 송산면

    일 정 :

    제1일 : 하기학교(Summer School)를 개학했다. 첫날이라 20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예배를 보고 그곳 교회에서 일하는 분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첫날부터 당번 순서대로 식사를 준비하고 비번들은 저녁예배 순서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첫날이라 특별시간이나 오락시간 없이 무사히 끝냈다.

    제2일 : 비좁은 교회를 잠시 떠나 국민학교를 빌려서 하기학교를 시작했다. 예배를 보고 오락시간을 통해 처음이라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여러 가지 게임과 음악으로 친화하고 많은 용기를 넣어 주는데 여념이 없었다.

    특별활동시간에 색종이 뜯어 붙이기를 하였다. 도시학생에 비해서 자신을 갖지 못하고 능동적이 못되는 면을 여실이 볼 수 있었다.자신과 용기를 길러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제 3일 : 장마철로 계속 나리는 빚는 우리가 교회에 갈 시간이면 아랑곳없이 멈추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성여고에 주시는 축복이라 생각하고 감사해했다.

    소독약을 각 집마다 나누어 드리고 여기에 보답하는 농촌사람들의 감사 말 한 마디마다에서 간직했다가 일을 하는 보람이 주는 기쁨이 이렇다고 누구에게든지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제 4일 : 노래 대회를 가졌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산 속의 꾀꼬리가 아닌가 분간 못할 정도로 변한 노랫소리였다.

    처음 왔을 땐 음이 모두 틀려서 한번 고쳐주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 오늘에사 다시 한 번 결실의 만족을 안겨 주었다. 창가에는 동네사람들이 제각기 얼굴을 내밀어 웃던 모습을 잠결에도 생각하면서 손바닥만한 밤하늘에 웃음을 사랑스럽게 던져보았다. 마루에 잠든 이 밤도 총총 별빛은 지새울 것이다.

    제 5 일 : 하기학교도 오늘로 마지막. 예배를 끝내고 특별히 융판 공부를 하므로 효과 있게 성경공부를 했다.

    교회선생님들에게 점심을 카레라이스로 대접하고 남은 소독약을 마저 나누어주며 구석진 마을까지도 찾아갔고 온 동네어른들이 모이는 곳마다 인성의 꽃을 찬양했다. 저녁예배를 보고 동화대회를 열었다.

    거의 270명에 다달은 숨막힐 듯한 교실 안에서, 대중 앞에서 말하는 능력을 길러주었고 조용히 들을 수 있는 습성을 길러주었다는 데 성과를 계산해봤다. 연재동화도 오늘로 끝맺음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창 밖과 교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빨려오는 듯함을 느끼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 전국여고생 음악콩쿠르 1969.10.06

    숙명여자 대학교에서 연례행사로 개최하는 전국여고생 음악콩쿠르에서 고3 의 박영숙양이 개인 출전하여 작곡 부문에서 1, 2등 없는 3등을 차지하여 실질적으론 최우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69년 10월 6일 1차로 예심 테스트에서 지정곡을 변주시키는 과제를 무사히 통과하여 다음날 2차 본심에서 「박목월」작시 「산이 날 에워싸고」를 자신이 작곡하여 이와 같은 좋은 실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 전국 각처에 서 참가한 많은 음악도(音樂徒)들 가운데서 유일한 입상자인 박 양에게는 숙 명여대 입학시엔 실기시험을 감안해 주는 특전이 베풀어질 것이라는 대학 당국의 발표 때문에 상장과 상품(목각 조각품)을 받아 안은 박 양의 기쁨은 한층 더 컸다.

    박 양은 평소에도 항상 학급의 합창지도를 맡아 왔고 본교 교내 큰 행사와 예배가 있을 때마다 피아노 반주를 혼자 맡아온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 학생회 기획위원회임원 인계식 1969.10.20

    1969학년도 일년 동안 학교를 위해 수고해 온 학생회 기획위원회 임원들이 다음 학년도 후계자들에게 그 임무를 맡기는 인계식이 10월 20일 오후 4시 30분에 고 3학년 2반 교실에서 교장선생님과 지도과장 선생님을 모신 가운데 열렸다.

    지내 온 일들을 반성하여 앞으로의 계획을 더욱 치밀하게 의논하는 이 자리 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진정으로 학교를 위하는 마음들이 일치한 듯 진지해 보였다.

  • 시와 음악의 밤 행사 1969.11.06
  • 벽지를 밝히는 횃불 하기봉사단 좌담회 1969.11.07

    매년 여름방학마다 가난한 농촌과 어촌을 찾아 희망의 등불을 밝혀 주었던 하기봉사단이 1969년 낙엽이 지는 늦가을에 좌담회를 가졌다. 다음은 교지 9집에 실린 저들의 체험기다.

     

    참석자 : 박희순 선생님

    강순자(고3 강) 강복희(고3 복) 유인숙(고2 유) 이환옥(고2 이)

    이윤옥(고2 윤) 지미숙(고1 지)

    사회자 : 노진숙(고2)

    기록자 형순희(고2) 이교순(고2)

    때 : 1969년 11월 7일

    장소 : 학교 상담실

    상담내용

    1. 우리 학교의 봉사 활동의 시작은 언제부터?

    2. 봉사 활동을 하고 보람을 느낀 점?

    3. 재미있는 에피소드?

    4. 애로점.

    5. 학생들의 관심.

    6.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

    사회 : 바쁘신 시간에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희순 선생님을 모 시고 지난 여름방학 하기 봉사대에 대하여 직접 참가하신 일꾼들인 여러분과 함께 봉사 활동에 대하여 기탄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우리 학교의 봉사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요? 먼저 봉사활동의 지도 선생 님이신 박희순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 : 맨 처음의 봉사활동의 시작은 지금부터 8년 전인 제1회 졸업생이 고등 학교 2학년이던 때 경기도 부천군 고잔의 도일 교회에 가서 하기 봉사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한 일은 수시로 성경 학교를 열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 치는 것이었고 또 여러 가지 계몽적인 사실을 배워 주고 아이들의 오락 지도 등이었지요. 그것이 그 당시 주민들에게 상당히 호응을 받고 성과도 좋았습니 다. 그 이후 해마다 빠지지 않고 봉사활동을 했지요.

    사회 : 네 잘 알았습니다. 오늘 날 본 계도에 오를 봉사활동이 62년도부터 시 작했으니 그 해가 정말 뜻 깊은 해군요.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 하고 있는 봉사 활동이란 농촌 계몽과는 그 의의는 같다고 하겠지만 의미상으로 약간의 다른 의미도 있는 것 같은데 선생님 어떻습니까?

    선생님 : 일반적으로 농촌 인들은 계몽운동이라고 하면 계몽자의 입장에서 계몽 대원들은 경원시하고 또 자칫하면 빈축을 사기도 쉽습니다. 더구나 아직도 배 우는 도중에 있는 어린 학생의 입장에서는 누구를 계몽한다기 보다는 가난하고 어려운 농촌 사회를 우리의 조그만 힘으로나마 보탬이 될 수 있게 도와주자는 의도에서 봉사활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네들에게 무엇을 계몽 할 능력보 다는 바쁜 농번기의 일손을 거들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준다거나 해야 봉 사활동의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학교는 기독교를 신봉하 는 만큼 예수님의 뜻을 따라 봉사할 수 있는 신앙인의 사명을 실천하는데도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사회 : 그런데 여러분께서 이번 여름 방학 때 충청도 당진으로 가서 봉사 활동 을 하고 오셨는데 가서 직접 봉사 활동을 하고 일꾼들로서 봉사에의 보람을 느 낀 점이 있으실텐데 얘기 좀 들려주세요.

    이 : 우리나라 농촌이라 하면 실상 도시의 문화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가난하 고 초라한 살림살이가 아닙니까. 그리하여 도시에서 자란 나로써 무언가 그네 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농촌인 그 곳에 가보니 까 개방적이고 활발한 도시인에 비해 농촌 사람들은 대단히 보수적이고 무엇이 나 나타내지를 않으려 하여 우리들에게 거리감을 갖고 대하더군요. 여기에서 저는 그 양자의 사이에 가로 놓여있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한데 융합되어 서로 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서 그런 방향에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동 들의 노래를 지도해 보면 음정이 잘 안 맞는데 이런 것을 잘 고쳐주고 신앙 을 보다 굳게 가지게 하고 이런 일을 통하여 보다 우리들과 친밀해지기 시작했 습니다. 처음 서먹서먹하던 것이 좀 친밀해지니 참 기쁘더군요.

    복 : 한옥양의 이야기처럼 그네들이 우리에게 호응을 할 때 대단히 만족스러웠 습니다. 처음엔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에 퍽 서운한 감이 있었고 처음 부터 어떤 반발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어요, 말하자면 어떤 열등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너희들이 무슨 계몽을 한답시고 그러느냐 하는 투였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우선 이러한 반발심부터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리하여 매 사에 감사한 태도로 임하고 아이들에게도 자상하고 친절히 대해주고 주민들에 게도 공손하고 예절 바르게 대했죠. 그랬더니 결국은 우리들에게 호응해 오더 군요.

    강 : 농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이 많죠. 그리고 의식주 생활이 거의 원시에 가까울 정도로 비합리적이고 비위생적인 생활을 하 고 있습니다. 현대 문명사회의 혜택이란 전혀 받지도 못하고 도시 사회와는 너 무나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데에 정말 같은 동포로서 가슴이 메어질 듯 한스러 워 질 때, 나의 조그만 힘이나마 그네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너무도 무지하고 몽매한 사상에 얽매여 있는 것에 조금이라도 눈 띄워주고 글 자를 알지 못해 편지 하나 쓰지 못하는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이렇 게 하여 무엇 한가지나마 그네들에게 알려 주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꼈습니 다.

    사회 : 네.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지난 여름 방학 때 당진의 봉 사활동 중 아주 재미있었던 에피소드 같은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해 주세요.

    유 :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난 후 휴식 시간을 가졌을 때 남루한 옷을 입 은 조그만 아이가 나에게 와서 머뭇머뭇 하더니 “ 선생님유”하면서 무엇을 내 밀기에 뭔가 하고 보았더니 바브민트 껌이에요. 나더러 씹으라고요. 그것을 받 지 않고 “착하다”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놓고는 달아나 버리잖아요. 그 후 곧잘 그 아이가 껌을 갖다 주곤 해요. 아마 제 집이 구멍 가게를 하나 봐요.(웃음) 그러더니 우리들이 모두 떠나오던 날은 껌을 주면서 “ 선생님유- 가시더라두 저희들 잊지 말아유-”하면서 눈물을 글썽이잖아요.

    지 : 어머나, 언니 눈에 눈물이 글썽이네요.(웃음)

    (일동 웃음)

    사회 :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엔 가장 재미있었던 일이라면 어떤 일인지요?

    강 : 재미있었던 일은 낙엽을 긁어모아 불을 때서 끼니때면 식사 당번이 분주히 밥을 짓는 데 기술 없는 솜씨지만 다 발휘해서 찬을 만들어 가지고 멍석을 퍼 놓고 식사를 하는데 모두들 굶은 사람들처럼 어떻게 잘들 먹는지...

    복 : 자기는 해 놓은 것 먹기만 하구서

    (일동 웃음)

    지 : 순자 언니는 총 책임자로 분주다망 했는데 식사 당번 할 겨를이 있었나요?

    사회 : 여러 가지 재미스러운 일도 많겠지만 또한 일을 해 나가시는 데엔 많은 어려운 점이나 곤란한 점도 있었을 거예요. 애로 점 같은 것을 박 선생님 좀.

    선생님 : 저는 무엇보다 일하는 우리 봉사 대원들이 더운 날씨에 모기는 많고 해서 혹시나 병에 안 걸릴까 하는 것이 염려 됐어요. 그래서 잘 때에는 방마다 모기약을 뿌려 주고 단속을 했죠.

    복 : 제가 감기에 걸렸었는데요. 선생님 죄송합니다.(꾸벅 절을 하는 바람에 또 한바탕 웃음)

    장 : 저희들 역시 배우는 학생의 몸으로 가히 남을 가르치겠다고 나서 선생님의 신분에 서고 보니 말 한 마디라도 조심해서 하고 여러 모로 그네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려니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되니 불편하더군요.

    윤 : 말괄량이들이 얌전한 선생님 노릇을 하려니 행동 자유의 구속을 받은 것입 니다.

    지 ; 특히 말을 그랬어유- 저랬어유- 하고 쓰는 충청도 사투리를 처음엔 잘못 알아들어서 아주 어려웠고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익히지 못해서 곤란하기 때문 에 명찰을 붙이는 일까지 벌렸어요.

    유 : 농촌 사람들에겐 도시인을 경원시 하는 태도가 엿보여요. 말하자면 도시인 들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데라하여 농촌을 멸시한다거나 천히 여기는 사상 이 있다고 보아요. 그래서 우리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처음엔 퍽 냉정하게들 해 요. 한 번은 의약품 같은 것을 나누어주려고 집마다 방문했더니 우리의 말은 들어보기도 전에 무조건 우리는 안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료로 드리는 것이 라하여 잘 이해시켰지만 정말 그 당장엔 무색하고 곤란했어요.

    선생님 : 처음엔 그렇게 반발했지만 차차 우리들이 잘 인식시켜 드리고 또 열심 히 일했고 자기네들의 자녀들을 정성스레 가르쳐 주고 또 자기네들의 어린아이 들을 데려다 돌보아주므로 바쁜 농사일을 하는데 편의를 봐 주고 하니까 그들 은 매우 고마워해요. 나중엔 그 지방 유지가 국민학교 교실 세 개를 빌려주는 등 우리들에게도 잘 협조해 주었어요.

    사회 : 이러한 봉사 활동에 대해서 이천여명의 우리 인성 학생들의 관심은 어떠 한지요? 또 곁들여 봉사 활동의 앞으로의 방향 제시 같은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럼 유인숙 양부터 말씀하실까요.

    유 : 농촌 문제 의식을 갖고 봉사에의 관심을 적극적 표하는 경향은 희박한 것 같아요. 그러나 많은 학생들은 방학을 통하여 실제로 어렵고 가난한 농촌에 뛰 어들어 일해 보고 싶어하는 의욕을 갖고 있습니다.

    지 : 이번 여름 방학 때의 봉사대원은 고등학교 각 반에서 한 명씩 참석하여 모 든 준비에 대하여서는 어렵지는 않았어요. 작년에 다녀온 언니들이 있었으니까 요. 하지만 가기 전까지는 약간의 고민도 했지만 이 조그만 가슴으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퍽이나 즐겁고 기뻤답니다.

    유 : 물론 우리들 학생이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봉사 활동을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적극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농촌인 스스로가 자기 고장 을 아끼고 가꿀 줄 아는 마음씨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 일반적으로 시골 사람들은 도시를 무척 동경의 대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조건 도시는 화려하고 안일한 생활들을 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그리하여 청 소년들이 무턱대고 자기의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나와서 나쁜 길로 빠지는 경 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자기의 고장을 버릴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힘 으로 내 고장을 잘 살게 만들어 보겠다는 향토 애착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즉 시원한 분위기의 농촌 사회와 도시 사회와의 거리감을 좁히고 서로가 대화의 광장을 찾아 자기의 처해진 위치를 알고 일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유 : 네.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직접 가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 지만 즉 글을 가르쳐 주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배워주고 하는 것 등은 퍽 중요 한 일입니다만 보다 중요한 것은 농촌인들의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개선할 점이 많습니다. 아까도 이야기되었지만 덮어놓고 도시는 다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 하고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일들이 빈번한데 이렇게 자기의 고장을 가 꾸고 돌보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커다란 문제입니다. 고장의 일꾼들을 잃고 있 다는 농촌인들 스스로가 자기네들의 후진성을 깨닫고 개선할 의욕을 가져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덴마크 부흥의 원동력이 국민들 스스로에서 우러나왔듯이 우리나라 농촌 사회도 농촌인 스스로가 깨우쳐 자기네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는 것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계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 네. 아주 좋은 이야기인데요 농촌 사회의 부흥이란 농촌인 스스로의 의욕과 노력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도시인들도 우리의 후진한 농촌 사회에 무관심해서는 안되죠. 도시 사회만 극 도의 물질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데 비해 아직 농촌 사회엔 거의 원시적 생 활 속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어선 한 나라의 문화가 발전하였다고는 말 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어려운 우리의 농촌 사회에 대해서 적극 관심을 가지고 농촌 부흥의 길을 모색해 보는데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학교 봉사 활동 대원들은 학생의 신분에서 무언가 농촌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요는 농촌 사회의 부흥을 우리들 전 국민이 적극 관심을 가지고 이에 협조해야 합니 다.

    사회 : 네. 그러한 정신적인 문제란 퍽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현 지에 나가서 실제 활동을 하면서 느끼고 또한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 같은 것 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 우선 현지에 나가서 일을 하려면 그 고장 주민들과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합 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그 고장에서 봉사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우리들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마을의 어른들과 함께 의논해서 우리의 할 일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일단 일을 마치고 나서도 얼마나 성과를 얻었는지 그 잘잘못을 돌이켜 생각해 봄으로써 다음의 보다 효 과적인 방법을 강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복 : 글을 가르친다는 활동도 좋지만 의약품 같은 것을 갖고 가서 환자들을 치 료해 주는 일도 그 고장 주민들에게는 좋은 활동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 : 농촌 계몽운동에서 고장의 주민들에게 자칫 빈축을 사는 일이 있는데 이런 일을 없애는 데는 그 고장 주민들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도록 함이 필요합 니다.

    이 : 그리고 봉사 활동을 할 때에 무엇인가가 뚜렷하게 한 가지씩이라도 업적이 남게 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주민들과 협조하여 개울에 다리를 하나 놓았다거나 우물을 하나 만들었다던가 하는 일말입니다. 나중에 우리들이 봉사 활동을 끝마치고 돌아 올 때에 그들의 눈에 확 뜨이는 흔적이 보인다면 우리들의 봉사활동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 같아요.

    선생님 : 그리고 봉사 활동을 하고 그 고장을 떠나 왔다고 무관심할 것이 아니 라 평소에도 늘 그 곳과의 유대를 갖고 그 고장 발전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 어요. 예를 들면 자매결연을 맺는다던가 하여 그 고장에서 필요로 하는 우리의 힘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끊임없이 봉사 활동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 각합니다.

    사회 : 네 모두들 장시간 동안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바쁘 신 시간을 내 주신 박희순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이것으로써 오늘의 ‘봉사 활동’의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추수감사절 행사 1969.11.13
  • 1969년도 학교 생활 1969.12
  • 졸업식 답사 19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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