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역사 연구 소장 이만열 장로
1. 인천제일교회와 안디옥교회
인천제일교회는 1946년 10월 19일 당시 북한정권의 핍박을 받아 월남한 14명의 성도들이 조직하여 발전한 교회다. 이들은, 의지할 데라고는 전혀 없는 인천에 와서 하나님의 도우심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기도에 전혀 힘쓰며 이 교회를 세웠다.
이 곳에 있던 일본 메쏘디스트 교회를 인수하기 위해 24시간 기도 운동을 폈던 것은 이 교회를 시작할 때에 얼마나 기도에 힘썼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 교회를 설립한 성도들이 14명이라는 점은 1887년 8월 27일 서울에서 한국 교우들이 언더우드와 함께 장로교회를 처음 설립할 때 14명이었다는 점과 우연히 일치되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인천제일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지를 떠나 피난온 성도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11장 19-30절에 보이는 안디옥 교회를 연상한다.
안디옥교회는, 여루살렘교회가 받은 핍박으로 흩어진 무리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유대인과 헬라(그리스)인들에게까지 전도하여 세운 교회다. 인천제일교회나 안디옥교회가 다같이 핍박을 받아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세웠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발견한다.
성경은 안디옥교회에서 먼저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주어졌다는 것과, 흉년을 만나 자신들도 여유가 없는 형편이었지만 유다에 있는 형제들을 도와 처음으로 기독교적인 구제를 시작하였다는 것, 그리고 이 교회에서 먼저 해외선교가 시작하였다는 것(행 13장)을 보여주고 있다. 인천제일교회도 북한에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남하하여 세운 교회로서, 안디옥교회와 같은 장점들을 다음과 같이 갖고 있었다.
2. 인천제일교회의 설립과 그 성격
인천제일교회의 초기의 역사에서 보이는 다음의 사실들은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다.
첫째, 인천은 서울의 관문이기도 해서 첫 선교사를 맞아들인 곳이다. 그런 만큼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되었고, 안디옥교회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나타났으며, 앞으로도 한국복음화의 꿈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인천제일교회의 출현은, 비록 안디옥교회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먼저 받게 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장로교회를 가장 먼저 배출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했다. 원래 인천은, 초기 선교역사와 관련된 선교지 분할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감리교 선교지역이었고, 따라서 분할협정의 당사자였던 장로교회는 이곳에 전혀 선교할 수 없었다. 참고로 8.15당시 교파별 현황은, 감리교가 내리교회 외에 10개의 교회를 가졌고, 그 밖에 천주교는 답동 성당(신도수 1,904명), 송결교는 평동교회 외 3개, 침례교는 송현교회 외 1개, 성공회와 구세군이 각각 1개의 교회를 갖고 있었다. 그곳에 해방 후 장로교회로서 인천제일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마치 안디옥에서 예수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다가 헬라인들에 의한 첼라파 기독교가 출현하는 것과 같은 이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교회를 설립하자 곧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46년 1951년 사이에 이 교회는 신설 3개, 분립 6개의 교회를 설립하여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이미지를 심었고, 또 이 선교의 방편으로서 인성학교를 세웠다. 인성학교의 설립은, 당시로서는 가장 열악한 조건 속에 있던 여성들을 위해 선교적 차원에서 중등교육을 시작한 것으로, 이는 마치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양성했듯이 인성의 교사와 학생들을 전도자로 양육했던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셋째, 그들은 교회를 세우자 곧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바디다 모자원을 세우고 구제사업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는 안디옥교회가 아직 자신이 넉넉하지 않았는데도 구제에 나섰듯이 인천제일교회가 아직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구제를 시작한 것으로, 기독교의 참 구제정신이 교회설립 초기부터 이렇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곳을 거쳐간 피난민이 수 만 명이나 되어 마치 월남 피난민의 남쪽 교두보의 구실을 했다고 하니, 그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는 말할 필요가 없다. 다비다 모자원은 월남하여 의지할 데 없는 분들에게 단순히 의식을 제공하는 역할만 행한 것이 아니고 신령한 의미로 하나님 나라 시민의 영적 교두보 역할도 잘 감당했던 것이다.
인천제일교회는 이렇게 초기부터 이곳에 월남 피난민들을 위한 교두보를 설정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선교사를 가장 먼저 맞았던 제물포를 다시 선교의 기지로 만드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3. 인천제일교회와 이기혁 목사
인천제일교회가 시작된지 7개월쯤 된 1947년 5월에 이 교회의 목회자로 이기혁 목사가 부임했다. 평북 용천 출신의 이 목사는 북한에서 일고 있던 기독교 박해운동에 견딜 수 없어 피난길에 올라 이곳으로 왔다. 그는 피난지에 와서 같이 피난 왔던 형제 자매들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활동하던 바나바가 피난민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와서 활동한 것처럼, 이기혁 목사는 예루살렘과 같이 기독교가 번창했던 북한 교회에서 내려와 피난민 교회인 인천제일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피난민들이 세운 지 얼만 안 되어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도왔던 안디옥교회처럼, 인천제일교회는 설립한 지 얼마되지 않아 이기혁 목사가 와서 비약적으로 성장, 발전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바나바와 이기혁 목사, 두 분은 피난민 교회를 양육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노정을 걸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 목사님께서 시무 하실 때에 인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목사님을 자주 뵐 수 있었고 그의 부탁을 받아 제일교회에서 설교도 했으며 그 후에도 목사님의 동정이 비교적 소상히 알려졌기 때문에, 인천제일교회 하면 곧 이 목사님을 연상하게 되었다. 이 목사님은 1898년 12월 28일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이 해에 용천에서는 동문외교회와 신창교회가 설립되었고, 이듬해에는 서석교회와 덕천동교회가 설립되었다. 1904-05년의 일.러 전쟁으로 평북 일대의 기독교세는 급증하였다. 그는 1918년 3월에 선천 신성학교를 졸업하였다. 신성학교는 다윗과 골리앗을 들어 자주 설교한 선교사 윤산온(G. S. McCune) 목사가 교장으로 시무한 곳이며, 1911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무고하게 잡혀가 옥고를 치루기도 한, 말하자면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학교였다. 이 목사님이 기독교의 복음을 말하면서 항상 민족과 국가를 연결시켜 강조한 것은 그의 신성학교 시절에 받은 교육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민족 사랑이 오산학교를 빼 놓고는 생각할 수 없듯이, 이 목사님의 생애에도 신성학교의 교육은 그의 일생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이다.
신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선천 명신학교 교사로 교육 일선에 나섰다. 당시 애국계몽, 민족운동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3월에 그는 결혼하였다. 아마도 이 때 그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 지방의 3.1운동에 앞장섰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민족교육이 하나님 신앙에 기초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1927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3년에 졸업하였다. 그의 동기생 중 기독교 농촌운동가로서 민족복음화운동과 애농회(愛農會)를 이끈 박학전 목사가 있었는데, 그와는 1970년대까지 인천에서 서로 교유하였다. 평양신학교 졸업 후에 그는 용천군 운향교회와 용암포제일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월남하기까지 일제 말, 공산 치하의 기간동안 고난 당하는 교인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그의 민족 교육가로서의 자질과 열심은 용암포에서 구세학교를 설립, 운영한 데서도 나타났다.
공산 치하에서 양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목회지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던 그가 월남을 감행한 데에는 그 교회의 한 권사님의 강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하루는 그 권사님이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네가 목사를 보내지 않으면 내가 너를 징계하겠다’고 하는 음성을 들었다면서 피난하기를 강권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처 그는 월남하였다.
1947년 5월 당회장으로 부임한 이 목사님은 인천제일교회를 발판으로 하여 월남한 피난민들을 거두어 위로하고 신앙으로 이끄는 일을 주도하는 한편 그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기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을 서둘렀다. 현 인천초등학교의 전신인 무궁화공민학교와 서울로 옮긴 선천 보성여학교의 분교 형식으로 인성여중고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구제기관으로 다비다 모자원을 설립하여 피난와서 의지할 데 없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인천제일교회는 이기혁 목사님을 만나 그야말로 인천에서 제일 가는 교회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 한편 이 목사님도 이 교회를 발판으로 기독계와 교육계에 공적인 활동무대를 넓힐 수 있었다. 그가 1961년 전국복음화운동을 제안, 추진한 것과 대한예수장로회 (통합) 총회장 및 크리스챤 신문 사장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이면에는 그가 평생동안 전심으로 봉사했던 인천제일교회의 끊임없는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목사 방지일
나에게 선천 신성학원과 평양신학의 대 선배이신 이기혁 목사님께서는 신성학원을 나오시고, 선천에 있는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직을 사임하고 학생으로 평양 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神學)을 연마하시고자 정든 교정을 떠나시려 할 때, 선천 사회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목사 등 많은 인재를 길러내시며 모든 학생들과 학부형들의 존경의 대상이셨던 용천 출신이신 이기혁 선생님을 보내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였고 많은 분들이 만류하였다.
그렇게도 고집하시면서 떠나시던 그 때가 우리 민족으로서는 여명기에 해당한다. 3.1운동이 지난 뒤라 교육열이 높아지는 때에 인망 높은 교사를 놓치는 아쉬움이 많았던 것을 나는 생생이 기억한다.
세월은 흘러 나는 중국 선교사로 중국에 한 20년 가 있는 동안 한국은 해방이 되었고 또 38선으로 갈라지는 비애, 6.25 전란으로 폐허가 된 와중에 나는 국외에 있었으나 이 목사님은 한국의 관문인 인천으로 오셔서 인천의 개척자로 계심을 보았고 한국 교회에서 그 분과의 만남이 빈번하여 이 목사님을 만나 포부를 들을 때마다 그에게서 더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만나는 빈도가 많을수록 그가 고상한 인격자인 동시에 깊은 신앙인인 것을 알게 되어 그 분을 더 깊게 더 넓게 더 높게 존경하게 되었다.
이 지면을 통하여 이 목사님의 인생관을 몇 부분으로 적어 볼 까 한다. 이기혁 목사께선 이러한 분이시었다.
o 넓은 시야, 넓은 포용력, 깊은 통찰, 높은 견해를 가지신 분
o 복음화의 기수
o 건설적 적극성으로 일하신 분
o 고매한 인격을 가진 범인에서 뛰어난 분
o 개척자이며 모범적 신앙인
이번에는 이 몇 가지 점에서 이 목사님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른 기회가 있을 때, 또 다른 면의 관점도 정리하였으면 한다.
이 목사님은 넓은 시야를 가지셨다. 또 넓은 포용력을 가지시어 많은 인재를 포용하신 분이다.
깊은 통찰로 한 민족의 앞 길 한국 교회를 생각하신 분이다. 높은 견해를 가지시고 인천 제일 교회의 목사이시나 언제나 보심이 한국 전역은 물론, 세계를 널리 보시며 사신 분이다. 통일되는 날 교회 역군의 부족을 염려하신 분이다.
신학교를 더할수록 이는 한국 통일을 대비함이라고 이런 넓고, 높고 깊은 그의 사색에는 바다 같은 넓이, 태산 같은 숭고한 견해, 심도 있는 통찰력으로 사람을 대하며 구상하심을 때로 듣는다. 총회장으로 미국을 순회하시면서 이런 면을 강하게 도처에 피력하여 미국 교계서도 그 큰 인물인 것이 인정되어, 그의 제의를 실천할 후계자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기혁 목사님은 한국 복음화, 세계 복음화의 기수 !
그의 제창으로 복음화 운동이 한국에 일어나 오늘에 이르렀고, 국내적으로 군복음화, 학원복음화, 공장 복음화 등 복음화 운동은 이 목사님으로부터 발기되어 오늘에 이른 바이고 제창은 하시고도 범교단적으로 이 일을 전개시킴에 자신의 이름이 그 조직에 빠진 것이다.
복음화 운동의 회장은 이화여대 김활란 박사로 맡게 하셨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큰 운동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큰 집회가 성공적이라 부흥사들이 연합해서 이런 대집회를 시도 중 우리 교단 증경 총회장들의 이름으로 총재 등 이름이 나돌기도 하여 이 목사님의 이름이 주축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구성이 초교파적임에 좋으나 너무 질서의 혼란을 가져 올 우려도 있어 이 목사님에게 아무데나 이름을 허락하시지 않은 것이 좋으시다하니 꿩 잡는 것이 매가 아니오 많이 모이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시며 폭 넓은 아량 있는 대답도 하셨다.
그런 모임이 약간 무리도 있어 거기 손을 떼시기도 하신 바 있기도 하다. 복음을 전하자는 데는 다른 것은 불문에 붙이기도 하심을 기억하기도 한다. 교통사고를 당하신 뒤 불편한 몸이시지만 복음 전하는 일이 있을 때는 거기 참여하시어 응원하심이 컸다.
이 목사님의 구상에는 언제든지 건설적인 적극성을 가지셨다. 파괴적 소극성은 그에게 전혀 없으셨다. 자기가 담임하신 인천 제일교회에서도 무엇이든지 건설적이시었고 적극적이셨다. 교육에 있어서도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내지 대학교까지 구상하고 그 무리함도 많았으나 교육면에서도 큰 공을 세워 오늘까지 초등교육으로부터 고등학교까지 세워 우수한 학교로 발전하였다. 대학의 꿈은 이루시지 못했으나 이는 그의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만 있었으면 으레 이도 실천하였을 분이시다. 있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실로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신 분이다. 그와 같이 일하셨던 대부분의 장로님들이 거의 가셨거니와 그 분들은 이런 면을 너무 잘 아실 것이다.
교회도 학교 재단에 넣었던 것이 문제도 되었으나 목사님 생각은 대학까지 자라게 하는데는 재단 구성이 튼튼해야 하기에 이렇게 건설적 의미에서 했으나 후임자들이 재단에서 교회를 빼내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함도 들었다.
교육을 교회보다 앞세우려 하심이 아니라 그 기틀을 잡으시려는 데서 일시적 방편을 삼으셨던 것이다. 무슨 일에도 그는 “아니오”가 없었다. 적극성 있게 해 보자고 밀고 나가시는 일은 개교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총회적으로 하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문서전도, 방송 전도에 기수라 할 수 있는 분이 본국에는 없고, 외국에 있어 이 분을 전도사로 기여히 모시도록 노회에 권유하고 역설하여 규례대로는 무리였지만 이분이 전도사 인허를 받게까지 하였다.
이 일이 합법적이 아닐 수도 있으나 내 노회에서 된 일이라 목사님의 건설적 적극성에서는 모든 회원도 수긍하였던 것이다.
이 목사님은 개척자이시다. 그 정신이 그렇게 되신 분이거니와 실제로 해방 후에 월남하셔서 인천에는 그의 개척으로 장로교의 교세가 확장되어졌다.
인천은 개신교 선교사의 발이 처음으로 밟았던 곳이다. 이곳을 복음화 하는데서 전국 복음화가 되어진다는 뜻이 깊었다. 전에는 인천은 감리교 구역임으로 우리 장로교는 거의 없었다. 해방 후에 이런 규정을 없이 하였다.
이 때에 이 목사님은 인천을 개척하신 개척자이셨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제일교회라 이름하였음으로 그 후에 제 2,3,4,5,6,7,8 교회까지 나아가기도 했고 더 많은 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관문에 개척을 뜻 있게 하신 분이시다. 거기 기독교 교육도 고등교육까지 완비하시려는 의도이셨으나 시간이 모자라서 그 뜻을 펴지 못 하시고 가시었다. 대학의 꿈을 이루시지 못했으나 고등학교까지는 명문의 학교가 되었다. 교육으로도 인천에는 개척자이시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에서 인천이 관문이라 선교사의 첫발을 디딘 곳으로 후손들에게 길갈의 뜻을 풍기게 생각하신 대로 그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인천에 가면 언더우드 아펜셀라 두 선교사를 기억함 같이 이기혁 목사님도 자연히 기억하게 되어짐은 그가 개척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이 목사님은 범인에서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의 교회관에 있어서도 보통 분이 아니심은 자기 소속 교단에 충성하면서도 폭넓게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사업에 열중하심을 본다.
세계적 안목으로 이요한 전도사의 문서전도를 힘껏 후원하셨고 그가 미국 전국의 TV 채널을 폭넓게 잡고 복음을 전하심에 그를 본 노회 전도사의 자격을 갖도록 지도하신 것도 그가 교파를 초월하여 일하는데 적극 도와주시고자 하심이었다.
앞으로 통일된 다음에 북쪽을 위하여 인물이 결핍할 것을 늘 걱정하시면서 한국에 신학교가 많이 세워지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신 것이다. 복음화 된 이상촌을 건설하시려는 꿈도 대단하셨다. 이 문제를 가지고 몇 번 이야기도 주고받은 바 있다.
여기 동조하셨던 동지도 생겨 충남에 대지며, 수양관, 기도원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이 목사님이 가시고, 그 분도 연만하여 이민가게 된 고로 그 꿈도 이루지는 못 하였다. 자신이 뜻하신 것을 못 이루신 바도 많으나 그의 후손 중에는 신학적으로 한국 교계에 총망을 받는 이들이 일하고 있음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같이 부르신 이기혁 목사님의 후광이라고 본다.
이 목사님은 하나님께로 가셨으나 인천의 개척자로 제일교회는 그의 기념탑이 되어 길이길이 목사님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소천 십 주년 기념으로 기념집을 내심도 축하하거니와 앞으로 이 목사님이 품으셨던 그 뜻이 후대에 어느 모로도 이루어지는 그 실제가 이 목사님의 기념탑이 되어 빛을 나타내리라 본다.
박원호 장로
10년 전 우리들의 곁을 떠나 하늘 나라로 가신 우리들의 신앙의 아버지 고(故) 이기혁 목사님 그는 우리 교계(敎界)의 큰 별이었고, 동시에 우리들의 가장 친근한 스승이었습니다.
오늘 십 주기(十週忌)를 맞이하면서 그가 남기신 발자취를 잠시 회상하면서 그분의 유덕(遺德)을 추념(追念)하고, 교훈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그 분은 끊임없는 기도생활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1977년 7월 7일은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신 날이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성도들이 놀라고 만류를 하였습니다. 그 분이 1898년 생이시니까 80세가 되는 때입니다. 쇠약한 노구(老軀)로 40일 간의 금식기도란 우리들 상식으론 도저히 불가능하리란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독병원에 계시던 전의철 박사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말려야지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비장한 각오로 용문사 뒷산의 기도원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기도원을 관리하시는 목사님도 걱정하셨습니다. 60세 노인의 금식기도는 겪어 보았지만, 80세란 좀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 할 테니 과히 염려는 말라는 말을 믿고 우리는 하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다시 산으로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건강한 모습으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하여, 또, 학교를 위하여 조목조목 기도 제목을 적어 놓으시고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시며 오히려 걱정하는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바로 얼마 전 터진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으로 인한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 등,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기도하시는 노 목사님의 모습을 뒤로하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끝이 좋아야 좋다고들 합니다. 그 분처럼 한 평생을 신념을 가지고 복음화를 위해 역사하셨고, 또, 그 분처럼 마지막을 멋지게 보내신 분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의 일입니다. 4월 5일은 중부감기교회에서 인천 기독병원의 강석범(姜錫範) 원장과 신임 최원철(崔元哲) 원장의 이 취임 예배가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물론 서울에서도 병원협회 관계자 등과 인근의 많은 귀빈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인천 교육위원회의 김천홍 교육감 등 낯익은 분들의 얼굴들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석상에서 목사님께서는 평생의 소신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인성학교의 졸업식 때만 해도 제가 부축을 하고서 겨우 5분 정도의 설교를 할 만큼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한 때입니다. 그러나 그 날의 설교는 소신에 찬 간절한 내용이었고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복음화 될 때만이 살길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 병원과 같은 기독교 기관들의 역할이 중요하고, 기독교 교육이 중요함을 설파해 내려갔습니다. 한 평생의 총 결론을 설명하는 듯한 감명 깊은 연설이었습니다. 끝나고 집에 모셔다 드렸습니다. 집안에까지 부축해 드리려는 나에게 “오늘은 기분이 좋습네! 혼자 걸어 들어가겠네”하시면서 혼자 들어 가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사모님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찾았을 때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때였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잠자듯이 깨끗하게 우리들 곁을 떠난 뒤였습니다. 몇 시간 전 만해도 그렇게 열렬하게 열변을 토하시던 모습을 우리들은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문상 오셨던 목사님의 오랜 친구이신 영락교회의 한경직 원로 목사님께서는 “내가 세상에서 한 일로는 이 목사만 못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멋지게 임종할 수 있을런지?”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생을 하늘 나라 확장을 위해 바치신 고 이기혁 목사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면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 닮은 한 사람을 꼽으라면 서슴치 않고 고 이기혁 목사님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사님의 발자취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보고 교훈 받은 제일교회의 교인입니다. 평생의 자랑으로 삼고, 목사님이 남긴 교훈을 따를 뿐입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
어느 비 오는 날 사무실에 앉아서 방금 배달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 기사 중에 정치면에는 불안정한 현실, 그리고 사회면에서는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이를 읽으면서 모두는 깜짝 놀랐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서로 마주보며 걱정들 했다. 이때 이기혁 목사님은 신문을 들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 하셨다. 저는 여쭈어 보았다. “어디 가십니까?” 목사님은 대답하셨다. “교회당에 들어가려고...” 이 목사님은 신문을 들고 예배당으로 가서 강단 밑에 꿇어앉아서 “하나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으면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시며 눈물로 회개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는 것이었다.
이 분이 이기혁 목사님이시다.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새벽마다 또 종종 밤새워 기도하셨다. 언제나 하나님과 의논하셨고 하나님과 더불어 문제의 해결을 보셨다.
저는 1960년 정월에 부목사로 부임하였고, 그 후 4년 후 미국으로 2년 간 유학을 다녀왔다. 미국 유학 후 다시 원목으로 위임되어 11년을 이 목사님은 원로목사로 저는 담임목사로 지냈고 또 원 부목 관계로도 4년을 지냈다. 이러한 관계에서 불편을 느껴본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27세에 목사로 임직된 저로써는 아버지 같은 분이 계셔서 얼마나 도움이 되고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많은 허물과 실수를 다 덮어주고 감당해 주셨기에 마음껏 일할 수 있었음을 늘 감사해하고 있다.
그는 참으로 정직하고 겸손한 분이었다. 어느 주일 날 여름철이라 서울 지방에서 휴가 얻은 목사님들이 낮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 날 예배 후 이 친구 목사님들이 예배 후 점심을 하면서 서로 소감을 한 마디씩 나누었다. 이야기인즉 눈물을 흘리며 가슴 뿌듯이 감격하며 은혜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한 친구가 물었다. “어느 말씀에서 은혜 받았느냐?”
대답은 이렇다. “북한에 계신 동포 여러분!”에서부터 그대로 읽고 난 뒤에 설명을 덧붙이고 설교는 끝났다. 문제는 그처럼 솔직하고 정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이 이 목사님이셨다. 항상 “내가 잘못했구만” 쉽게 사과하고 또 겸손하게 다시 시작하셨다. 한마디의 변명 없는 진실한 사과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는 이 점에서 위대한 목회자였다.
또한 한 교회를 목회하면서도 언제나 인천시 전체 저 인천 교회를 염려하셨고, 나라와 민족 그리고 복음화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민족복음화”는 이 목사님의 작품적인 창이었다. 전도와 선교라는 말은 있어도 복음화라는 말은 이 목사님께서 주창하신 특유의 창안이었다. 늘 세계의 장래를 생각하며 온 민족 전체를 교구로 하고 염려하며 기도하고 애쓰신 분이다. 복음화의 끝과 환상에 살고 가셨다.
이 목사님은 동역자를 자랑하셨다. 후배를 아끼고 그들의 장래를 위해 늘 기도 하셨다. 항상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그리고 칭찬 외의 말씀을 듣기 어려울 만큼 항상 칭찬과 격려를 쉬지 않으셨다.
어느 날 총회 사무실에 들렸을 때 몇 분을 만나서 인사하고 이 목사님에 대해서 훌륭한 점과 그의 덕망을 소개했더니 그 때 앉은 분들이 일제히 크게 웃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뒤에 설명해서야 이유를 알았다. 방금 이 목사님께서 이 자리에서 제게 대해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시고 옆방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또 한 분의 설명은 이렇듯 원목과 부목이 서로 상대방을 칭찬하고 존경하니 어찌 교회가 부흥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제 대답은 이것도 이 목사님으로부터 조금 배운 것이라고 했다.
날이 갈수록 이 목사님 같은 교계 어른이 아쉽다고 느껴진다. 이제는 그리던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나서 옛 이야기하며 주께 감사하리라.
이동성 목사
나의 선친을 회상하며 그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생활 주변을 살펴보면 재치 있는 유머 감각과 즉흥적인 화술의 재능을 갖추어 순식간에 인기를 집중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위풍당당한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친은 외형으로 볼 때 이런 장점을 지닌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유약한 인상을 주는 분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나의 부친도 외형상으로 남을 압도하는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부친을 정확히 관찰하면서부터 그의 값진 내면의 정신적 세계를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높은 꿈과 그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끈질긴 집념과 넓은 마음가짐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의 인격의 진가가 점차로 높이 평가되는 고귀함을 지닌 인물임을 간파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의 부친으로부터 받은 경건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의 부친이 예수 믿던 시기는 기독교 전파 초기였으므로 전국적으로 교회당들은 무척 적었고 그의 부친이 살던 마을에는 교회당이 없었습니다. 거의 백리 길을 하루 전날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예배드리고 돌아와야 할 형편이므로 그의 부친(나의 할아버지)은 자기의 유일한 집 한 채를 팔아 예배당을 건립하고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비록 일찍이 부친을 여의었으나 모친 슬하에서 부친의 신앙을 전수 받으며 성장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신성 중학교를 다닐 때 모교의 교장 윤산온 선교사로부터 깊은 인격적 감화를 받아 그의 인격의 초석을 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편모 슬하에서 가난에 쪼들려 숱한 슬픔을 겪었고 멸시를 당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건강한 정신과 균형 잡힌 인격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부친으로부터의 경건한 신앙의 유산과 기독교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윤선온 선교사로부터 받은 인격적 감화였습니다.
그는 16세 되던 해 눈이 깊이 쌓인 뒷동산에 올라가서 가난에 찌든 슬픔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서약의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의 눈물은 가난의 슬픔에서 연유한 감정적 눈물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굳게 다짐하는 신앙적 결단의 감격 어린 눈물이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서약하는 눈물의 기도였고, 또 하나는 기독교 종합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결심의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서약의 기도를 하고 나서 거동이 불편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번도 새벽 기도를 빼먹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대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이북에서 처음으로 목사로서 시무할 때 구세 학교라고 하는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되자 공산당의 종교적 압박에 못 이겨 월남하여 인천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본래는 인천지역이 감리교선교지역으로 감리 교세가 선점했던 지역이었으나 인천 제일교회 설립과 함께 장로교세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친은 인천 제일교회 자체만의 교세 확장에 힘쓴 것이 아니라 인천 지역 도처에 교회 개척을 힘써 장로 교회 교세 확장에 심혈을 쏟았습니다.
그는 16세 때에 기도 중에 서약한 대로 기독교 종합대학을 설립할 것을 염원하여 인천 제일교회 시무 초기부터 교육기관의 설립을 구상하였습니다.
조국 해방 직후 제일교회 교우들의 생활 형편으로 보아 교육 기관 설립의 구상은 상상할 수 없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육기관의 설립은 부친에게는 절대 절명의 과제이었으므로 부친 자신의 역량으로 재원을 마련하여 송학 골짜기에 인성 학원의 초석을 다져놓았습니다.
초기에는 비정규학교로 시작하여 비록 기독교 종합대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오늘의 인성학원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 꿈을 시동했을 뿐 완결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지 만은 인천 제일교회가 그 꿈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교회에 그 운영의 책임을 맡기고 가셨습니다. 그의 꿈은 단지 기독교 종합 대학 설립으로 국한된 꿈이 아닙니다. 그의 보다 높은 꿈은 조국 복음화의 꿈이며, 기독교 종합 대학 설립 미완에 끝인 꿈도 그의 원대한 꿈을 계승한 인천 제일교회는 조국 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사명감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으로 봅니다.
또 한가지 그의 인격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평범 속에서의 훌륭한 점은 몸소 넓은 마음가짐의 덕을 실천하다가 가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부친은 항상 마음가짐을 넓게 하고 살라고 후손들에게 권면 하곤 하셨습니다. 부친이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은 결국 넓은 마음가짐을 갖고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성실, 슬기, 용기 같은 덕목들이 좋은 덕목들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덕목들이 목적적 가치가 있는 것들로 보지 않았습니다. 넓은 마음가짐으로 아량과 관용을 베풀려고 할 때에 성실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서 지혜와 슬기를 짜내야 하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덕목들은 넓은 마음가짐을 위한 수단적 가치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넓은 마음가짐의 삶이 가장 고귀한 삶이라고 교훈 하셨습니다.
그는 이 균형 잡힌 인격을 소유하고 가장 고귀한 삶을 실천하다 가신 분입니다.
그는 넓은 마음가짐의 개념을 기독교적 표현을 빌린다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의 개념으로 본 것입니다. 기독교적 사랑의 개념은 단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워서 다각도로 그 개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친은 인천지역사회에 여러 면으로 공적을 세웠지만 그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남들로부터 공적을 남김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을 받으며 살겠다는 의식 속에서 의도적으로 살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공적을 의식적으로 과시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며 넓은 마음가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또한 넓은 마음가짐을 갖고 사는 삶은 이웃에게 인격적으로 대하는 삶이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삶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상대방을 움직이려고 강압게 하는 삶이 아니며, 따라서 상대방의 자유와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존중하여 자율성에 맡기는 삶이라고 보고, 이러한 이웃 존중의 삶을 실천하며 살다가 가신 분입니다.
또한 교육기관 설립의 목적도 우리 국민이 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 안에서 이웃 사랑의 심성을 키워 넓은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서 보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선친께서는 조국 복음화의 높은 꿈과 그 꿈을 실현하려는 끈질긴 집념과 넓은 마음가짐을 실천하면서 높은 신앙의 세계에서 사시다가 가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의 인격의 진가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로 빛을 발하는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평범하고 검소한 삶을 지향하면서도 가장 가치있는 높은 신앙의 세계에서 위대하게 살다 가신 믿음의 선각자임을 발견하고 숙연히 머리를 숙이는 바입니다. (고인의 차남)
봉사의 실천자 -림인식 목사
옛날 유대 율법주의학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여리고 길에서 상인이 강도 만나 죽게 되었다. 제사장․레위인도 그냥 피해 지나갔고, 사마리아 사람이 구해주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 반문하시면서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네 이웃은 바로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이웃이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사마리아인처럼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 가운데 세 가지 인생 철학을 볼 수 있다.
그 첫째가 강도 철학으로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다. 그러므로 빼앗는다 하는 철학이다.
둘째는 제사장․레위인 철학으로 내 것은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내 것을 잘 지킨다는 철학이다.
셋째는 선한 사마리아인 철학으로 내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누어준다는 철학이다.
이런 철학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지 붙들어 주자, 일으켜 주자, 구해주자, 살려주자로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명하신 것은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구체적으로 돕는 생활, 즉, 봉사의 실천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모범적인 봉사실천 생활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전 인류에게 주시는 가장 훌륭한 생활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선한 사람은 건강을 봉사 실천에 쓰고 있다. 건강은 봉사하라고 주신 것으로 봉사에 쓸 때에 가치가 있다. 강도는 받은 건강을 남을 해치는데 쓰고 있고, 제사장․레위인은 남을 해치지도 돕지도 않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최대한 남을 살리기 위한 봉사실천에 쓰고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 고 말씀하신다.
24시간 나의 건강을 무엇에 쓰느냐 생각하야 한다. 봉사 실천에 쓰는 건강 그것이 자신을 위하여 세상을 바로 잡는 가치가 된다. 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시간을 봉사 실천에 쓰고 있다. 이 시간은 생명이라고까지 하며 우리 일생 중 가장 비싼 재산인 것이다. 강도는 시간을 남 헤치는 범죄에 쓰고 있고, 제사장․레위인은 직무 내지 신앙을 위해 쓰고 있으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남을 살리기 위한 봉사 실천에 쓰고 있다. 신앙일지라도 남을 살리는 봉사가 없으면 참 신앙이 못된다는 지적이다.
인자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섬기러 왔노라고 하시며, 그 시간 전부를 봉사에 쓰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 고귀한 시간을 봉사 실천에 지불하고 그 시간을 늘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지식과 기술을 봉사에 쓰고 있다. 21세기는 최첨단 문명기로 지식과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높아질수록 꼭 필요한 것은 봉사 실천이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지식 남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이어야 하는 것이다. 강도처럼 쓰기 때문에 자신도, 사회도, 무너지고 있는 것이고, 제사장․레위인처럼 쓴다고 해도 세상의 분위기는 바뀔 것이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지식․기술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봉사 실천에 쓸 때에 강도도 변화되어가고 죽을 사람도 살리게 되는 것이다.
고도 지식을 자랑하는 경쟁 시대에 가장 선행되며,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봉사 실천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돈․물질․재산을 봉사 실천에 쓰고 있다. 오늘의 시대는 경제 우선인 경제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중요하다는 경제도 살아나려면 봉사가 아니면 안 된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세계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 선조 퓨리탄(Puritan, 청교도)들이 성경 경제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미국행은 신앙적인 사회 건설에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언제나 비지니스(Business)는 서비스(Service)라고 하는 정신으로 살아간다.
이 서비스(Service)는 두 가지 의미로 하나는 예배, 다른 하나는 사람을 돕는 봉사이다.
그들은 예배와 봉사를 동일시하면서 모든 경제의 초점을 서비스(Service)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부강해질수록 얻어진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봉사가 있을 때에 그 사회는 아름다운 신뢰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귀․옷․가룸․데나리온 등 자기가 가진 전부를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지불하고 있다는 이것이 사회 건설의 생명 요인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마지막,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목숨을 내 놓고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아끼며,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해친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강도 소굴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도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 예수님께서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말씀하셨다. 강도는 물질에 목숨을 걸고 결국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제사장․레위인은 자기 목숨을 아끼는 나머지 남의 목숨을 살려주지 못하고 피해갔다. 사마리아 사람은 남의 생명을 살려주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는 말씀처럼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어디에 바치냐에 따라 그 생애가 결정되고, 그 영향이 열매로 맺혀지게 된다.
옛날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복음 선교에 바쳤기에 썩었던 대 로마가 새로운 갱생과 변화, 그리고 하늘 나라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는 나의 목숨을 봉사 실천에 내어 던질 때, 어떠한 썩은 사회도 바뀌어 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비유가 단순히 어떤 구제라든지, 실천 양상에만 가치가 있는 말씀이 아니고,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사탄과 죄악의 강도에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아담과 그 후손을 위해서 주님 친히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남들은 다 버리고 가는 희망도 없는 인생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해 주셨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죄의 문제의 해결과 동시에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바뀌어져서 그리스도의 주시는 새 생명과 새로운 인격과 생활로 개조되어 질 때에 비로써 개인도 살게 되고 나아가 사회도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핵심 진리이다.
존경하는 이기혁 목사님 10주기를 맞이하여 그 분은 목사님 중의 목사님이었다고 돌아본다. 철저한 복음주의적인 보수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생활을 사도 바울과도 같이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율법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되어 상대를 구원하기 위해 힘쓰신 진보적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힘쓰시는 주의 종이셨다. 성도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며, 사사로운 이해를 초월하셔서 친근감과 신뢰를 주신 목회자였다.
교회의 많은 일을 생각하시고 추진하셨으며, 특히 인천제일교회의 교회성장에 유익한 일은 어떤 일이라도 적극적으로 힘을 쓰셨다. 인천시를 성화시키겠다고 목표를 세우시고, 교회를 하나 둘 개척하시면서 분열 없는 화평의 교회로 만드시기에 힘써 오신 것도 알고 있다.
또 전 한국을 상대로 총회 차원에서 복음화 운동을 일으키시고 앞장을 서셨으니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 주제 표어였다. 그리고 수난 속에 깨어졌던 한국교회에 기적적인 부흥과 성장을 가져오도록 한 원동력 역할을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 목사님은 인재 양성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젊은이의 손목을 붙잡고 격려해 주시며 비전(Vision)을 갖게 해 주시고, 가능한 길이 있으면 키워주셨고, 학교를 설립하셔서 많은 인재 양성에 주력도 하셨다. 우리 교단 분열의 아픔 속에서 이 목사님은 평화의 사도로서 어떻게든 꿰매 보시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있어서도 보이게, 보이지 아니하게 인생을 바치셨다. 이 한국 교회 안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에 선두에 서서 현대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셔서 건강․시간․지식과 기량도, 물질․재산도, 봉사 실천에 바치시고, 고귀한 생명까지도 오로지 죽어 가는 한국 민족 속에서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하는 성스러운 목사님이라고 생각한다.
이 목사님의 발자취를 잊지 말고, 가지셨던 신앙과 정신을 살려서 그가 못 다 이루신 일을 위해 인천제일교회를 위시한 모든 후진 교역자들이 그의 명하시고 보여주시는 대로 매진할 때, 이 한국사회의 새 생명운동으로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목사님의 숭고한 발자취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할 수 있기 바란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이시여! 예수님 친히 생활로 보여주셨고, 비유로 가르쳐주셨고, 또 이 복음을 받으신 이 목사님께서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오늘 우리도 이 시대에 변화와 새 생명운동을 일으키는 그런 실천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
오늘 좌담회에 참가 하셔서 장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이 진지하게 말씀을 해 주신 여러분께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말씀하셨듯이 이기혁 목사님께서는 늘 검소하고, 겸손하고, 근면하고, 베푸는 삶을 사셨으며,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개척정신으로 시대가 교회에게 요구하는 일을 찾아 몸소 실천에 옮기신 참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육신은 비록 우리 곁에 안 계시지만, 목사님의 빛나는 업적과 정신은 우리와 함께 제일교회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이제는 목사님의 과거의 행적을 찾아 기리는데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계승․발전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차제에 한 말씀드린다면,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 뒤지지 않도록 교회가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찾아내어 실천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회나 기존의 기획위원회가 잘 하고 계시지만 교인들 중에는 각 부문의 전문 인력이 많이 숨어 있다고 봅니다. 발굴하여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으면 합니다.
또, 방 집사님이 말씀하신 청소년 훈련센터 문제라든가, 제일교회의 큰 보람으로 생각하는 다비다 모자원이 현재 장애인 시설 ‘명심원(明心院)’으로 이어졌다는데, 우리 교회가 아닌 불교신자들, 그 밖의 일반사회 단체들이 후원이 많다고 합니다.(‘인천제일’제10호 10쪽 참조) 적절한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진행자 하헌식)
․일시 : 1994년 4월 17일 15:00시
․장소 : 당회실
․초청인사 : 이연수, 김영남, 김만식 장로, 이희자, 이경숙 권사
하춘실 전도사, 안주백, 김상남, 방윤슌 집사
․교역자 : 이철신 목사, 정영창 전도사
․회보실 : 김덕용 장로, 하헌석, 이병문, 현화생, 김추복, 정성국, 김효임 집사
․진행 : 하헌식 집사
․김덕용 장로 : 이 목사님 소천 10년(1984년 4월 6일 86세로 소천)이 되었습니 다. 이번 회보를 고 이기혁 목사님 10주기 특집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분야 별로 추모하기 위해 일곱 분에게 원고 청탁을 했는데, 모두 과거에 이기혁 목 사님과 교분이 있었던 분들로 현재 대부분 외부 인사들입니다. 그래서 회보사 에서 다시 의논한 결과 우리 교인들이 알고 있는 이기혁 목사님을 조명해보고 그 분의 정신을 교회 안에서 살려나가자는 취지에서 이 자리를 만들었습다. 아 무쪼록 이 자리에 참여하신 분들께서 기탄없이 말씀해 주셔서 교회 발전에 보 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헌석 집사(이하 하로) : 본 좌담회에 참석하시게 된 여러분들은 회보사 편 집회의를 통해 각 분야별로 가장 적합한 분들을 선정해서 9분을 발표자로 초청 하였습니다. 오늘 좌담회는 목사님 소천 후 10년이 지난 지금, 그 정신을 어떻 게 계승․발전시키는가가 관건이 되겠는데, 진행의 효율을 위해서 나누어 드린 순서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이 목사님의 성장 배경과 사생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이연수 장로 : 목사님께서는 일찍 부친을 여의셨는데 부친께서도 자기 집을 팔아서 개척교회를 위해 헌남 할 정도로 신앙이 좋으셨던 모양이예요. 그리고 신성학교 다니면서 교장 선생님의 감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살 때부 터 소천하실 때까지 새벽기도를 빠진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목 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집안 일은 돌보지 않고 목회에 열중 하다보니 이따금 가정불화가 있었지요. 사모님과 다툴 때면 목사님은 담요를 들고 교회로 가면 그 싸움은 중단되어 버립니다. 목사님의 경제사정은 몹시 어 려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사님의 유가족들이 다 잘 되었지만 목사님 생전 에는 인간적으로 그렇게 불행할 수가 없었어요. 아들이 죽고 사위가 죽고 했죠. 그 때마다 목사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이희자 권사 : 사모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사모님의 근검절약은 유별났 습니다. 석유 몇 방울을 떨어진 것도 손으로 찍어서 담고, 쌀알 하나도 다시 골 라 담아요. 그 옆에서 누가 도와줄 수가 없어요. 사모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내 가 이렇게 해서 목사님을 뒷바라지했다고 합니다.
․하 :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제일교회와 목사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 십시오.
․김만식 장로 : 회보사에서 준 자료에 자세히 나와 있어서 다른 말을 할 필요 가 없겠고 제가 이기혁 목사님에 대해 느낀 것은 그분은 부교역자들에게 굉장 히 편하게 대해 주신 분이었습니다.
․이희자 권사 : 목사님은 언제나 남의 단점은 감싸주고, 장점을 세워주셨어요. 목사님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면 장점을 꼭 내세워주어요. 좌우간 목사님에게 가서 누구 흉을 못 봐요. “아, 그거 다 몰라 그럼메, 이제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됨메.” 하였지요. 너무나도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었습니다.
․이연수 장로 : 곽선희 목사님이 전도사였을 때입니다. 주일 낮 예배에 설교를 하였는데요. 이 목사님이 사회를 보시면 이중설교를 하시는 거예요. 곽선희 목 사님의 설교 시간보다 칭찬하시는 말씀이 더 길어요. 이런 설교를 어디가서 듣 겠느냐고 칭찬하셨지요.
․방윤순 집사 : 매일 새벽마다 곽선희 목사님을 위해서 저 젊은 종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곽 목사님을 유학 보내실 때 비용을 대고, 월급도 드렸어요. 정년 퇴임도 실은 정년 나이가 아니셨는데 곽 목사님을 키우기 위해서 일찍 정년하신 것 같아요.
․하 : 주로 부목사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런 이 목사님의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일교회의 전통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외 예배, 선 교, 교육, 봉사, 구제 등 교회가 갖추어야 할 분야에 대해 목사님의 영향을 받 지 않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자세한 것은 그간의 회보와 오늘 나눠 드린 자료 를 참조하십시오. 이제는 노회 및 총회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김영남 장로 : 이 목사님이 총회 50주년 회년의 해인 1962년, 47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셨더군요. 그 때부터 전국복음화를 제창하셨습니다. 1965년 4월 19 일 청주에서 전국복음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강사는 김활란 박사였지요. 우 리교회 30년사에는 이 부분이 빠졌고, 1965년에 이대 강당에서 전국복음화운동 을 했다고 나와 있는데, 이대 강당에서는 그 해 5월에 80여명의 각 교파 중진 들이 모여서 대회를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사료들을 조사해 보면 좀더 많은 내용이 나올 겁니다.
․하 : 이 목사님께서 청주 노회장이 되신 것이 33세였습니다. 1936년 평북 용 천노회 노회장이었지요. 이후로 피난와서 55년 경기노회장을 비롯해서 62년 총 회장이 되어서 전국복음화 운동을 시작하여 1974년까지 전국복음화 운동위원 장을 역임하셨다. 민족복음화 운동이라는 말을 제일 먼저 제안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연합장로회 총회, 남장로교 총회에서도 인정되 어 복음화 운동이라는 말을 ‘이기혁안’이라고 해서 이 목사님을 초청해서 미국 에서 순회 강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민족복음화 운동은 뿌리가 깊이 내려 국내선교와 세계선교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 활동뿐만 아니라 노회에서도 상당히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이제 선교에 대해서 하 전도사님이 말씀 해 주시지요.
․하춘실 전도사 : 지금 제가 중국 선교를 한답시고 열심히 뛰다가 어느 날 문 득 내가 이렇게 뛰게 된 이유가 뭔가 생각해 보니 제 뒤에는 이기혁 목사님이 계셨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본당을 지은 후의 일입니다 .본당 문을 열고 나오면 황해가 보이죠. 목사님께선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셨는데 그 지팡이로 인천항을 가리키면서 “저기로 복음이 들어왔는데 이제 우리가 저기로 복음을 보내야 되는데, 중국과 북한 저쪽으로 보내야 되는데...” 저는 그 말씀을 들으 면서도 그때는 그 일이 제 일이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요즘 선교활동을 하면 서 이기혁 목사님이 계시다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을 텐데 하는 이쉬움이 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이철신 목사님께서 선교 비젼 을 갖고 있어서 제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때 ‘3천만을 그리스도 에게로’라는 푯말을 꽂아 놓고 온 교회가 이것을 위해서 24시간 연속 기도회를 했어요. 저도 한 일원으로서 토요일마다 기도하였는데 목사님이 지나가시다가 들어오셔서 같이 기도하시곤 하셨습니다.
․이희자 권사 : 그때 우리가 20대 후반이었는데요. 그 당시의 청년회의 열기는 대단했어요. 트럭 타고 나가서 북 치고 설교하며 전도하였지요. 이 목사님의 영 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춘실 전도사 : 군부대의 전국복음화라고 해서 군인들에게 단체 세례를 주게 된 것도 이 목사님이 처음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 : ‘인천제일’ 2호에 의하면, 1972년 군복음화 운동이 일어나 3,500명을 하 루에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베드로의 3,000명 세례 - 행 2장 - 후에 처음 있는 일. ‘인천제일’ 2호 21쪽 참고) 학원복음화, 병원선교 등 민족복음화 분야 가 참으로 광범위하였습니다.
․하춘실 전도사 : 외항선 선교회도 이기혁 목사님이 제창을 하셨습니다. 인천 은 많은 배들이 오는 천혜의 요새지다. 여기에 오는 선원들을 복음화하면 이들 이 전 세계로 흩어지니 직접 가지 않고도 세게 선교를 할 수 있다고 하여, 당 시 집사인 최기만 목사를 저녁예배 때에 불러서 간증하게 하고 우리 교회가 이 걸 전폭 지지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외항선 선교를 구성했었어요. 우리 교회가 굉장히 많은 역할을 감당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요즘 사람들은 감히 생각도 못하는 분립 교회입니다. 개척해서 분립을 시키는 것이지요. 그 당시 목사님께서는 그 교회를 이끌어 갈 만한 살림꾼을 떼어 주 면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다른 교회의 나이 많이 든 장로님들을 만나면, 옛 날에 제일교회 다녔는데 이 목사님이 개척하시면서 그때 나왔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지금은 내 교회 키우려고 버스 가지고 가서 다 데려오고, 교회 하나 개척시켜 주고서도 행정을 도와 줄 수 있는 제직 하나 떼어 주는 것도 인 색한데, 그때 그분은 이미 내 교회 네 교회가 아니었어요.
․하 : 이제 교육으로 가서 말씀해 주시지요.
․이연수 장로 : 목사님께서는 기도하는 중에 교육을 통한 선교에 특별한 소명 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전도사 생활 3년 기간을 빼고 는 목사님과 교육과는 떨어진 적이 없어요. 처음에 교사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 았고, 그 다음부터는 목사님이 계신 곳은 하다 못해 유치원이라도 했습니다. 교 육에 대한 목사님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학교를 지을 때 얘기입니다. 그 때 저는 학생이었습니다. 주일날 목사님을 뵈러 들어갔더니, 노무자들이 좁은 마 루에 가득 차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보는데 목사님이 멱살 잡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하여간 인성학교를 지으면서 고초를 많이 당하면서 도 포기하지 않고 이 학교를 오늘날까지 발전하게 했다는 것은 그 분의 교육을 통한 선교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방윤순 집사 : 저 역시 이기혁 목사님의 목회에서 큰 부분이 인성학원을 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학교 교훈은 신앙, 자유, 봉공입니다. 그분이 다른 분에 비해 특별했던 것은 남성교육보다 여학교 교육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여 성 교육으로 신앙의 어머니를 길러야 전국복음화가 가능하다는 말씀을 누차 하 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1946년 10월에 창립하고, 47년부터 무궁화 유치원을 세 웠고, 49년에 인성학교의 전신인 무궁화 공민학교를 설립하고, 3년 후 1952년 전쟁의 페허 속에서 여학교를 세운 것이 인성 여중입니다. 처음에는 서울 영락 교회 부설 보성 여자중학교의 인천분교로 세웠는데, 1954년 3월 제일여중으로 문교부 인가를 받으려고 하였으나 나중에 세워진 학교가 무슨 제일이냐 해서 학교 이름이 인성(仁聖)여중으로 해서 인가를 받았습니다. 저희 학교 연혁을 말할 때는 1952년 5월 15일로 합니다. 여고는 1961년에 인가를 받았습니다. 우 리 교회가 교회 건축도 힘들 정도로 가난했었는데 학교 부지에 대한 대책이 아 무 것도 없을 때 목사님은 믿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주변이 적산 가옥이었는 데요, 그 땅들을 하나님이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적산 가옥을 처리하는 분들에 게 가서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학교 부지로 인가를 받아 접수하면서 당신 께서 직접 교섭을 다하셨고, 집 지을 때도 이연수 장로님 말씀처럼 노무자들에 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도 하나도 개인 재산으로 등록을 하지 않으셨고, 학교 를 교회의 소유로 하셨습니다. 1963년에 무궁화공민학교는 인성국민학교로 됩 니다. 그런데 1985년까지는 저희가 국고 보조를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사 립학교가 재정난을 겪는 일이 드물지만 인성국민학교를 어렵게 이어 나갔습니 다. 그러면서도 문교부에 학교를 내놓고 국고 보조를 받는 일에 선뜻 나서지 않았던 곳도 아마 이기혁 목사님께서 교회가 학교를 키워야 한다는 정신이 아 닌가 합니다. 그래서 학교의 발전이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학부모의 기부금 문 제에 대해서도 깨끗하였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목사님께서 매우 엄하셨습니 다. 제가 인성국민하교를 나왔는데, 소풍갈 때 학부모들이 한 명도 따라가는 일 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초창기 학교 땅이 적었는데, 새벽기도에 나오셔서 주변 개인의 땅들을 밟으면서 “아 하나님 이 땅을 인성학교 부지로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던 모습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이루어 졌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기혁 목사님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교 교육에 있 어서 초점이 된 것은 60년대부터 젊은이들을 기르는 교육을 많이 하셨습니다. 서울대 출신의 우수한 젊은 교사들을 인성학교로 많이 모셔왔어요. 그 분들이 지금 한국 교회나 한국의 대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학 원 학비로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특례까지 베풀며 젊은 인재 양성에 꿈을 가지 셨던 분입니다.
․김추복 집사 : 제가 인성여고 3회 졸업생입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장학금 제도가 있다고 하여 들어갔는데 그 전에 믿지 않다가 인성학교 다니면서 선생 님들의 감화로 다니게 되어 지금까지 왔습니다. 교사들이 대부분 대학을 갓나 온 서울대 출신으로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열의는 대단했습니다. 저희가 학교 다닐 때는 학교가 좁아서 강의 시간마다 집과 집 사이로 다니며 수업을 받았어 요. 그렇게 좁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학교생활이 얼마나 즐겁고 기뻤는지 모 릅니다. 당시에 예배보기 싫어서 화장실로 도망 다닌 친구들이 지금은 목회자 의 사모가 되어 있거나, 교회의 중추가 되어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인성여고의 신앙교육에 대해서 참 많이 감사하고 있어요. 단체 영화관람도 다른 학교가 100원에 가면 우리는 65원에 갔어요. 그 정도로 깨끗한 학교였습니다. 이 목사 님께서 교사를 뽑으실 때 신앙이 먼저인 선생님을 먼저 보신 것 같아요. 지금 인성학교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교사를 채용할 때에 신앙이 먼저인 선생님들 을 채용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방윤순 집사 : 82, 3년도 학교와 교회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교회와 학교 중 둘 중의 하나가 주안 쪽으로 나가는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이기 혁 목사님께서 이 땅을 고집하셨어요. 그래서 땅이 좁은 것이 저희들로서는 서 운해요.
․이연수 장로 : 그것은 그 분대로의 신념이었지요, 교회 밑에 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김만식 장로 : 만약 주안으로 나갔으면 분리되었을 거예요.
․김덕용 장로 : 돌아가시기 3, 4년 전 사람들이 자꾸 그 문제를 말하니까 이 목사님께서 그럼 한번 해보라고 승낙하셨어요. 그래서 홍 목사님과 함께 교회 와 학교의 5인위원회를 조직해서 여러 번 회의를 해서 5개년 계획으로 해서 나 가기로 했는데, 교회의 재정위원회들이 홍 목사님을 모시고 주안 산꼭대기로 가보더니 당시 공동묘지 자리여서 을씨년스럽다고 여기에 어떻게 학교가 오느 냐고 해서 홍 목사님이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지요.
․하 : 이제까지는 이 목사님의 교육정신에 대해 말해 보았는데, 이제 봉사와 구제 쪽에서 이희자 권사님과 이경숙 권사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이희자 권사 : 1952년 7월 27일 전쟁 미망인들을 위한 사회 선교사업으로 다 비다 모자원이 설립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현재 구의동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안경봉 집사님이 당시에 실무를 담당하였으니 설립당시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당시 초교파적인 세계기독교 봉사회 시찰장으로 있으면서 실 무를 거의 다 담당하였습니다. 구호물자가 부산항에 도착하면 그것을 모두 인 성학교로 운반하여, 전국 모자원, 유아원, 고아원 등으로 보냈지요. 참 구제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말 사심이 없고 진실하여 모자들을 잘 돌봐 주셨습 니다. 모자원 출신 중에 신앙 없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김추복 집사 : 제물포 기독교 백화점에 책을 사러갔는데, 그 주인이 다비다 모자원 출신이라면서 여성들이 살기 힘들 때 여성들에게 자립할 기틀을 주셔서 제가 이만큼 커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8교회 분립할 때 이 목사 님께서 장로님과 집사님 등 20여명 정도를 붙여 주시면서 교회를 자립하라고 하여 그 교회를 섬겼다고 해요.
․이희자 권사 : 우리교회에도 모자원 출신이 많아요. 정재순 권사가 대표적 인 물이지요. 모자원 출신임을 항상 떳떳하게 내세우며 자랑해요. 그렇게 감사하 며 은혜를 다 갚을 길이 없다고 하며 지금도 죽도록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경숙 집사 : 6.25후 갈 데 없는 모자들을 수용한 일은 정말로 귀한 사역이 었습니다. 당시 모자원이 없었더라면 그 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죠. 제 기억으로 모자원 마당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었습니다. 그리고 모자원에서 무궁화공민학교로 많이 왔죠. 저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무궁화공민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요, 이 목사님께서는 공민학교라고 해서 아무나 교사로 쓰지 않으셨어요. 자격이 있는 사람만 채용했지요. 그때 인중(仁中)에 들어가기가 매 우 힘들었었는데 우리 무궁화공민학교에서 많이 들어갔어요. 지금에 와서 보면 우리 학교 출신들 중에 훌륭하게 된 사람들이 많아요. 언젠가 국회의원이 인사 하길래 인사 받고 보니 무궁화공민학교 출신이라고 해요.
․김만식 장로 : 저도 무궁화공민학교 출신입니다. 이경숙 권사님께 6개월 간 배웠습니다. 피난 와서 나이 때문에 다른 학교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 수 믿게 되고 오늘까지 지내 왔습니다.
․이병문 집사 : 저 역시 피난 와서 나이 때문에 무궁화공민학교에 들어갔습니 다. 그 때 이경숙 권사님께서 저를 받아 주셨지요. 머리가 좋다고 하시면서요. (모두 웃음) 매우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는데 학교생활은 천국이라 말할 수 있 을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선생님들은 신앙과 사랑으로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전교생이 다 교인이었어요. 학교와 교회가 구분이 안되었을 정도입니다. 학교 선생님들 주일 날 교회에 가면 또 만났지요. 또 학교에서 모든 것을 제공했습 니다. 소풍을 가도 점심부터 상품까지 모든 준비를 학교에서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교직에 있으면서 그 때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신앙 교육과 인성(人性) 교 육을 함께 하였습니다.
․이경숙 권사 : 당시에 학교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한태준 장로님이 교장으 로 계시면서 오리를 수천 마리 키워서 운영했었어요.
․김영남 장로 : 제가 51년에 무궁화공민학교에 다녔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에 보면 설립 년도가 49년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저희 반이 첫 반이었 거든요. 좀더 자세한 고증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하 : 거기에 대한 것은 나중에 50년사를 준비할 때 확실히 알아서 잘못된 부 분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그 이 이기혁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 면 말씀해 주시지요.
․김덕용 장로 : 제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니까 이 목사님은 사람의 장단점을 잘 보시고 적재적소에 일을 맡겨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일에 대해 열을 내기 마련이예요. 그리고 일을 맡겨 놓은 후 계속 격려하세요.
․이연수 장로 : 돌아가시기 전에 목사님의 철학을 들어보자고 해서 한번 교회 학교 교사들과 함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의 말씀이 “나는 된다고 말한 적도 없고, 안 된다고 말한 적도 없슴메.” 그 때는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학교와 교회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당회록을 쭉 훑 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대지와 학교 대지와의 관계에 대해 기록 이 하나도 없어요.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오해도 하겠지요. 대지 구입시 직접 계약을 하고, 변제하는 것은 학교나 모금을 통해서 하셨는데, 모든 일 처 리를 당신 스스로 하셨어요. 결과적으로 그 때 제가 생각하기에는 목사님이 주 장할 수 있는 것을 당회에 내놓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목사님은 벌써 멀리 내 다보는 비젼을 가지고 있는데 그 당시 교회 하나만으로도 힘든 상황이라 학교 까지 하는 일은 당회의 동의를 못 받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는 비젼을 가 지고 있지만 그것을 모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스, 노를 분명히 못하고 그것을 끌고 왔다는 내용으로 지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예스, 노를 분 명히 했더라면 그 때부터 분규가 일어나서 아무 것도 못하였을 거예요. 두루뭉 실하게 넘겼기 때문에 그 적산 가옥을 다 사서 오늘날 이런 인성학교와 교회의 기반을 갖추지 않았는가 합니다.
․이경숙 권사 : 그 분은 생전에 너무 어렵게 사셨어요. 가끔 찾아뵙고 나면 마 음이 아팠습니다. 언제나 새벽기도 오시기 전에 교회 십자가 탑 앞에서 두 손 을 들고 기도하셨어요. 새벽기도 때도 항상 제일 앞자리에 앉으셨지요. 새벽기 도가 끝나면 너무도 큰 분인데 사랑을 참 골고루 세심하게 베푸셨어요.
․김영남 장로 : 79년도 저희 아버님 산소에 비석을 세울 때 일입니다. 그 때 목사님이 현장에 계셨어요. 한창 일하는 저를 부르셔서 아버님 비석세우는 일 을 칭찬하시고, 비석 세우는 일보다 너의 삶이 이 비석에 부끄럽다면 이것 세 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그렇게 충고하신 말이 생각납니다. 사실 돈 들여 비 석 세우는 일은 간단합니다만, 비문에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습도 그런 측면에서 많이 생각합니다. 이 목사님 은 공산주의와 트러블이 있을 때 김일성과 독대를 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너무 고생만 하신 것은 아닌가, 아니면 우리들의 그릇이 작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 목사님께서는 훌륭한 정신과 업적들을 세워 놓고 가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 과연 되었었나, 우리 교회의 현 위치에서 이기혁 목사님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합니 다. 앞으로 우리교회 희년 50주년 준비도 있고 하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안주백 집사 : 제가 제일교회에 온 것이 19년째입니다. 제 아버님이 의정부 성시화 운동을 하신 것도 이 목사님의 영향이었어요. 아버님을 통해 훌륭한 분 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그분을 가까이에서 뵈온 적이 별로 없어서 무엇이 어떻게 훌륭한지는 몰랐지요. 악수하실 때 힘있게 하셨고 젊은이들에게 교회적 사명을 강조하신 것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셨을 때 발인 전날 우연히 혼자서 시신을 모시고 밤을 새웠습니다. 생전에는 가까이에서 모 시지 못하다가 조문객이 다 떠나고 없는 밤에 제가 그 분 곁에 있으면서 혼자 서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전혀 두려움없이 보냈습니다. 그리고 근간에 와서 회 보사에서 계속 이기혁 목사님의 업적을 자랑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 시 간부터라도 교회 안의 복음화 사업, 선교사회봉사 부분에 대해 교회 차원에서 심도 있게 의논하여 계승․발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상남 집사 : 저도 역시 이기혁 목사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없고, 지면을 통해서 그 분을 알게 되었는데, 너무 훌륭하신 목사님을 곁에서 모시고 그 분의 감화를 받으신 분들이 부럽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거론된 내용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이 목사님은 무에서 유를 일구어 내신 분이라고 생각됩 니다. 그리고 ‘민족복음화’로 인천이라는 지역성을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도 크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황태식 집사 : 목사님과는 개인적인 교분은 별로 없구요. 제 결혼식 주례를 봐 주셨습니다. 결혼 후 81년부터 이 교회에 다녔는데, 오늘의 우리 교회 모습 을 볼 때 우리교인들에게 그 분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열 의가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한번쯤은 짚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믿 음의 질을 높여서 삶으로 실천하는 면이 있어야만 고인에 대한 대접이고, 우리 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 : 이제는 목사님 소천 후 10년 간 제일교회의 모습에서 그 분의 정신이나 업적이 발전된 부분이나 유명무실화된 것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 다.
․이경숙 권사 : 이 목사님께서 대학을 세우시기를 원하셨지요.
․방윤순 집사 : 그리고 목사님께서 70년대 이후에는 청소년 신앙교육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당시 교육담당 전도사님이 김기선 목사님이었는데 “인천에 청소년 신앙훈련센타를 세워야겠으니 그 때가 되면 임자가 맡아 기르시오.”라고 하셨 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어요. 우리 교회가 할 일 이 많겠지만 청소년에 대한 비젼을 갖고 목사님의 정신을 계승․발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병문 집사 : 이 좌담회가 그저 목사님에 대한 업적과 정신을 주고받으며 끝 날 것이 아니라 이 좌담회를 계기로 해서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자면 이 목사님께 서 그 당시 시대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일들을 찾아서 하신 것 같이 우리도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먼저 진단해 봐야 될 것 같습니 다. 이러한 비젼이 제시되지 않아서 뛸 수 있는 사람이 뛰지 않고 있는 것 같 습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힘에 닿는데 까지 뛰노라면 우리의 신앙도 자라지 않 을까 하는데, 그런 얘기를 좀더 나누었으면 좋겠는데요.
․김영남 장로 : 그 분의 그 많은 정신들을 우리 대에서 다 이룰 수 있다고는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분이 남기신 것 중에서 우리가 유산으로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하나라도 착실히 이어받아서 다음 주자에게 바톤 을 넘겨주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에 위임목사가 다섯 분이셨는데, 대부분 제대로 이어진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기 혁 목사님에 대해 다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현실적으로 보면 그런 것들이 다 우리들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계승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주백 집사 : 지금까지 나온 모든 의견을 보면 그 분의 정신을 잘 찾아내고, 결론에 가서는 이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자라고 끝나요. 그런데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거예요. 그러려면 구체적인 기구가 나와야 돼요. 그래서 동기를 부여할 협의체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만들지 못하다보니까 매번 이야기로 끝나게 되죠. 저는 이번 기회에 교회 발전을 위한 기구가 탄생 되도록 어떤 움직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박광원 집사 : 이런 좋은 기회에 좋은 말씀을 듣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여 러분의 말씀을 들으니까 이 목사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분의 정신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자라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대 로 실천한 분이십니다. 순교적인 정신도 가지고 있으며, 후계자를 양성할 줄 알 고, 원대한 꿈이 있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기혁 목사님이 너무 큰 분이어서 그 다음에 오신 목사님들이 정말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 고 교회도 그렇게 큰 분이 떠나니까 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 니다. 사실 이기혁 목사님께서는 당신을 추앙하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보다 훨 씬 훌륭한 목사가 우리 교회에서 나오기를 하늘 나라에서 기다리고 계실지 몰 라요.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철신 목사님을 모시고 이 시대에 맞는 교회 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연구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하 : 사실 처음에 좌담회를 계획할 때에는 계승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토 의하려고 시간을 많이 할애했는데, 이기혁 목사님의 정신과 업적을 조명하는데 진지한 말씀들이 많이 나와 시간조절을 잘하지 못하게 되어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당회장님을 비롯하여 당회원들이 여러분 계시 니까, 앞으로 교회 정책에 오늘 논의 된 내용들이 반영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 제 마지막으로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이철신 목사님 : 지금까지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이기혁 목사님에 대해 그 리고 우리 교인들의 생각에 대해 많이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제가 부임해 올 때 얘기입니다. 인천제일교회에 가겠다고 하니까 우리 교회를 잘 아시는 목사 님들이 충고를 해 주셨는데 제일교회에 가면 담임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이 이기 혁 목사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과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를 요구할 것이라고 했 습니다.(모두웃음) 와서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기혁 목사도 아니 고 곽선희 목사도 아닙니다. 제가 만약 모방한다면 그것도 우습지요. 이기혁 목 사님의 정신을 우리가 이어 받는 것과 그 분의 삶 스타일까지 그대로 모방하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혼동하여 그 분의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하 려 하면 그것은 시대 착오가 될 것이고, 또 발전이 아니라 퇴보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정신을 열심히 계승해나가야 하고, 또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다른 좋은 전통도 찾아서 계승해 나가야겠습니다.
인성학교 운동장에서 고(故)이기혁 목사님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운동장 한 쪽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조국 복음화 운동에 일생을 바치신 이 (李)목사님의 인성학교 설립정신이 뚜렷이 적혀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뜨겁게 울린다.
PARBO 연주회
1994년 11월 5일 오후 3시 시청각실.
최고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바보들의 축제, '바보들이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이 ‘성야’안내문에 내건 문구다.
PARBO 연주회는 작고 아담한 시청각 실에서 이루어졌다. 프로가 아니기에 미흡한 점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런 서투름이 더 신선하게 느껴진 훌륭한 연주회였다.
대동놀이
본교 운동장에서는 대동놀이가 있었다. 풍물패 '하야'의 길놀이로 시작된 이 대동 놀이는 길쌈놀이, 멍석말이, 기차놀이 등 다양한 프로로 진행된다.
선생님과 선후배, 타학교 학생들이 손을 잡고 놀이를 즐기는 동안 조금이나마 어색함과 불편함을 허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