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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53 INSUNG GIRLS’ HIGH SCHOOL                                                 INSUNG GIRLS’ HIGH SCHOOL Vol. 53





 VS
 역사특집   현장취재

 역사     영화  나비 힘차게 날다




 1학년 김다정  2학년 허유진


        수요 집회 참가후기

           지난 5월 7일 인성여고 2학년 학생들은 다
        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주
        한일본대사관 앞으로 향했다. 제1125회째 열리
        고 있는 수요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이다.
           이날 학생들은 각자 손수 제작한 플랜카드를 높이

        들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했다.
 비운의 왕 광해
           인성여고 학생 외에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마리아
 광해군 성군인가, 폭군인가?  수녀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이화나비, 평화나비, 희망나비, 민족문

        제연구소 대전지부, 고양파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등 많은 민간단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또 한 명의 광해!  대부분 명을 위해 군  체와 개인들이 참가했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붕당정치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 자  사를  보내야  한다고   그중 극단‘고래’의 단원들이 다음 날인 어버이날을 맞이해 위안부 피
 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점점 난폭해져 가던 왕 ‘광  했다. 당시 중국 땅  해 할머님들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려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해’는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위협에 노출될 대역을 찾을 것을 지시  에서는  명나라가  점
 한다.기방의 취객들 사이에 걸쭉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하선을 발견하고, 영  점 기울어가고, 오랑  이날 우리는 수요 집회 시작 전 여는 노래로 ‘바위처럼’을 불렀고, 학생회장 이한나 학생
 문도 모른 채 궁에 끌려간 하선은 광해군이 자리를 비운 하룻밤 가슴 조이며 왕  캐로 깔보던 후금이 커나가고 있었고 이때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면 또   을 포함한 각 단체들의 대표의 자유발언을 들은 후 마지막 순서에는 다 같이 구호를 외쳤다.

 의 대역을 하게 된다. 실록에 실제로 15일간의 광해군의 행적이 빠져있기는 하  전쟁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걸 광해군은 알았다.
 나 영화 ‘광해’에서는 독살과 위험으로 폭군의 이미지를 띄고 있는 광해가 두려  그래서 광해군은 명나라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후금의 불만을 막을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범죄를 인정하고 진상을 규명하라!
 움에 자신과 닮은 사람을 찾는다는 픽션을 더했다.   수 있는 자주적 실리외교에 힘썼다. 광해군은 명의 요구대로 원군을 파견하되,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법정 배상하라!
 임진왜란의 피해가 채 가시기도 전 1608년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가 왕  후금의 미움도 사지 않는 중립을 찾았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고 교육하라!
 이 된다. 본명은 이혼이며 선조의 둘째아들이다. 광해군은 임금이었음에도 불  이처럼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선택한 광해군 덕분에 조선은 또
 구하고 군 자리에 머무른 불행한 군주였다. 그에게는 항상 ‘폭군’이란 이미지  한 번의 전쟁 위기를 극복하였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군주도 정권에서 소외되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서라!
 가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지만, 광해군은 폭군이기 이전에 혼돈의 시기에 탁월  었던 서인들에게 ‘군주가 은혜를 몰라서는 나라가 설 수 없다.’라는 이유로 몰아
 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외교 정책을 펼친 명군주이다. 임진왜란 때도 아버지   내고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광해군이 ‘  구호에 명시되어있듯 아직까지 일본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일본의 추악한 만행
 선조는 의주로 피신가고 있었지만 광해는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 것도 인조반정의 또 다른 이  을 부인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한국 정부도 이런 일본의 반응에 늑장 대응만 보이고 있어 실
 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  유이다. 폐모란 선조의 두 번째 왕비인 인목 대비를 일반 백성으로 신분을 낮추  질적 피해보상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조(임시로 세운 조정)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수도 방위에도 힘  고 서궁에 유폐시킨 일이고, 살제란 배다른 동생인 영창 대군을 죽인 일이다.   점점 연세가 많아지심에 따라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일본의 위안부 범죄의 산증인인 피해자
 을 기울였다.   이 일을 기회로 신하들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인륜을 어  할머님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이때 광해군은 여러 지역을 찾아다니며 군대와 식량을 모아 왜군을 막는   겼다며 광해군을 왕위에서 쫓아냈다. 이후 역사 속에서 광해군은 뛰어난 외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주역인 우리
 데 큰 공을 세웠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분조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  전문가보다는 폭군으로 등장하게 된다. 어머니와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고 폭군  청소년들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을 풀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되찾도록 노
 복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황폐해진 조선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  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심지어 한 역사학자는 “광해군이 없었다면 조선은   력했으면 한다.

 을 때 중국에서는 명나라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만주에서는 여  이미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더라도 우리는 절대 일본의 위안부 만행을 잊어서는 안 될 것
 진족들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이에 명나라  이처럼 묘호조차도 없는 백성을 사랑한 비운의 왕 광해는 정치적으로 뛰  이다.
 는 임진왜란 때 베푼 은혜를 강조하며 조선에 도와달라고 했고 조선의 신하들은   어난 명군주였다.

 22 인성여자고등학교                                                                                             현장취재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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