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자료

오늘도 바람은 그 돌문을 지나간다
  • 작성일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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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虹霓門)은 미워해야할 대상인데 예쁘다. 청일전쟁 후 일본인들이 인천으로 물밀 듯 들어왔다.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금의 중앙동, 관동, 송학동이 비좁아 졌다. 그들은 전동, 만석동으로 땅을 넓혀 나갔다. 지름길이 필요했다.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문을 냈다.

 

일본 공병대가 암석 폭파 등 토목공사를 했고 중국인(쿨리) 석수장이와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해 난공사 끝에 1908년에 완성했다. 3년 걸려 만든 그것을 일본인들은 '혈문(穴門)'이라 불렀다. 구멍 '혈' 자에, 문 '문'자로 풀이하면 ‘구멍 문’이었다.
 
올해로 구멍을 뚫은 지 정확히 110년의 시간이 흘렀다.6.7m의 폭은 그대로였지만 홍예문은 광복 후에도 인천의 주요 교통로였다. 자동차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길이었다.
화평동, 전동 등 동인천역 인근에서 인천시청(현 중구청), 항구 등이 있던 중구 지역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자동차도 복잡한 용동 마루턱을 피해 이 길을 오르내리며 문을 통과했다.
 
자유공원에 놀러왔던 아이들은 이 돌문을 지나면서 괜히 소리 지르며 공명(共鳴) 현상을 신기해하곤 했다. 여름 삼복중에는 이곳 문 앞에서 런닝셔츠를 걷어 부치고 무더위를 피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자주 접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깔대기 효과로 인해 이곳에서 강력한 에어콘 역할을 했다.

출처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http://www.incheon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