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자료

운동경기보다 치열했던 교련 경연대회
  • 작성일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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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년대 앨범에는 보이지 않던 낯선 사진들이 70년대 들어서자마자 보이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군복 비슷한 얼룩무늬 옷을 입었다.

1969년부터 ‘교련(敎鍊)’이 전면적 실시되었다. 1968년 북한이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무장간첩(공비)을 침투시킨 1·21사태가 발생했다.
안보의식과 전시 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교련이 고등학교의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당시 주 4시간이던 체육 수업을 3시간 줄이고 교련을 주 2시간으로 편성했다.
 
 
당시 학생회 대표는 연대장으로, 학년 대표를 대대장으로 불렀다. 먼저 제식훈련을 배운 후 분열과 사열을 실시했다. 이후 남학생은 총검술, 소총분해 결합 등을 배웠다. 총은 나무로 만든 목총이 대부분이었고 80년대부터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M16 소총을 다뤘다. 여학생은 주로 구급법을 익혔다.

출처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http://www.incheonin.com)